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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박진영의 책 '무엇을 위해 살죠'에 대한 변명

by 하 루 살 이 2020.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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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메섹 이전과 이후

 

 

박진영이 최근에 내놓은 책 '무엇을 위해 살죠'을 두고 여러 이야기가 나온다. 유튜브에는 신학자라는 사람들이 이 책에 대해 논평을 내놓기 시작했다. 영상의 제목도 '구원파'와 연관 짓고 있다. 

 

나는 박진영과 구원파의 관계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믿음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에게 죽음의 한계를 넘어서는 그 무엇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삶의 이유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느냐. 나는 누구인가. 이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그것을 제쳐두고 오직 박진영이 구원파냐 아니냐 여기에만 관심을 두는 것을 두고 박진영도 아쉬움을 이야기했다. 

 

wpalss.tistory.com/1067

 

박진영과 구원파 논란, 믿음에 대하여

골고다 위에서 모든 인간적인 가능성과 더불어 종교적인 가능성도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졌다. 골고다는 율법의 마지막, 종교의 한계다. 칼 바르트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년)는 그의 역작

wpalss.tistory.com

그러한데 최근 유튜브에 올라온, 스스로를 목사라, 신학자라 하는 자들의 말이 얼마나 유치한지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박진영의 책을 보며 나는 그의 책 뒷 부분에 나오는 교회 운영에 대해 비판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를 옹호하고 변명할 수밖에 없겠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왜냐. 박진영이 말하는 '믿음'을 나는 위의 링크에서 이미 충분히 이야기했다. 박진영이 말하는 믿음이 성경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 믿음의 확신을 이야기하는 것이 비록 구원파의 전도방식과 비슷하더라도 그것이 성경에 기초한 것이라면 우린 그것을 함부로 비판할 수 없다는 것. 오히려 믿음에 기초한 구원을 말한다면 우리는 그 또한 귀한 형제라 칭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고작 인간이 만든 교계의 이단 정의가 무조건 옳다고 보는 것이야말로 오류가 산적한 판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는 성경을 가까이하는 자들이라면 당연히 피해야 할 오류이다. 이미 바리새인 '가말리엘'을 통해 우린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이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 (중략)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사도행전 5:35, 38~39 

 

 

사진출처=JYP엔터테인먼트

 

나는 이 글의 첫 시작을 '다메섹 이전과 이후'라고 말했다. 이 표현은 칼 바르트가 자신의 책 '로마서'에서 쓴 표현이다.  

무슨 의미인지는 성경을 가까이 한 사람이라면 잘 알 것이라 생각한다. 이는 바울의 회심을 의미한다. 이 회심이 바울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줬는지, 그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사울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바울이라 했다. 

 

믿음.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한 예를 들어보자. 내가 죄를 짓고 종신형을 받고 감옥에 있다고 해보자. 빛도 볼 수 없는 그 구덩이에서 누군가가 나를 건져줬다고 할 때 나는 처음엔 의아할 것이고, 이해하기 힘들 것이며, 경험해보지 못한 황홀한 기쁨과 그 사람에 대한 격한 감사를 가질 것이다. 당연히 생길만한 인간의 감정이다.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해, 나를 구속한 이유에 대해 하나씩 알아볼 것이 분명하다. 나를 속박한 그 모든 것에서 건져낸 그 사람을 존경하고 신뢰하고 감사해 마지않으리라. 

 

이 조건을 두고 생각을 해보자. 

같은 예로, 예수께서 언젠가 죽을 나에게, 죄를 짓고 살 수밖에 없는 죄에 굴복된 인생에게, 언젠가 심판받게 될 나를 위해 그 운명에서 나를 건져주셨다는 것이 바로 이 성경이 말하는 구속이다. 그 조건에는 신천지처럼 '십사만사천'이라는 한계가 없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디도서 2:11)'이며 '차별이 없고(로마서 10:12)', '모든 사람에게 비취는(마태복음 5:15)' 등불이다. 그래서 이런 성경 구절을 우리는 자세히 읽어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롬 11:32

 

 

믿음이란 어려운 게 아니다. 감옥에서 건짐을 받은 사람의 심정을 우린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암을 치료받은 사람이 자신을 치료해준 의사에게 감사해하는 마음을 우린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익사 직전에 건짐을 받은 사람이 건져준 사람에 대해 느낄 감사를 우린 공감할 수 있다. 불 가운데서 건짐을 받은 사람이 구조대를 향해 표현하는 감사를 굳이 경험하지 않고도 알 수 있다. 다만 그 감사를 이해는 하나, 직접 경험하지 않았기에 그것의 본질을 모를 뿐이다.  

 

박진영이 자신의 책에 올려놓은 자신의 성경. 그는 '무엇을 위해 살죠'에서 하루 10시간 씩 성경을 읽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만큼 그는 진리를 찾는데 갈급했던 것이다. 

 

믿음이란 그런 것이다.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는데(로마서 5:12) 거기에서 너를 건져주시기 위해 그리스도가 대신 죽었다라는 것을 확실히 믿게 된 내가 '이제 살았구나'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믿어졌을 때) 느낄 안도,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는 내 의지에서 생긴 게 아니다. 억지로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자연스럽게 내 안에 온 '생명의 확신'이다. 믿음이란 이와 비슷하다. 나의 힘과 무관한 다른 힘에 의해 내가 살게 됐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생기는 무한한 감동과 감사, 그리고 '살았다'는 확신, 그것을 주신 분에 대한 순종, 그 총체의 것이 '믿음'으로 표현된 것이다. 특히 이 진정한 감사는 오직 그것을 경험한 자만이 아는 것이다. 믿음의 경험이 없다면 우리는 그저 '이해'만 할 뿐이다. 나의 상황과, 나의 위기와, 나의 죽음을 아는 인간이 드디어 '살게 됐을 때' 느낄 그 감사는 내가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해주신 이로부터 생긴 위대한 감사이기 때문이다. 

 

박진영이 말하는 바도 이것이다. 그래서 그는 나의 의지에 의한 '믿습니다'보다 '믿어짐'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늘로부터 주어진 믿음, 곧 믿어짐 말이다. '믿는다'라는 표현이 물론 틀린 것은 아니나 그 바탕에 '믿어졌다'는,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믿음이 있음을 말함도 결코 틀린 것이 아니다. 성경에는 이런 표현들이 무수히 나온다.

 


1.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벧후 1:1

to them that have obtained precious faith with us through the righteousness of God and our Saviour Jesus Christ.  2 Peter 1:1 


-> 개혁성경은 힘입어라 표현했고, 킹제임스는 '의하여, 통하여'라 표현했다. 곧 믿음을 얻되 주로부터 얻음을 강조했다.



2.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faith cometh by hearing, and hearing by the word of God.  Romans 10:17


-> 믿음을 '나의 의지'로 인한 결과가 아니라 주어짐이라는 의미로서 온다는 것을 내포한다. 


3.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빌 3:9
And be found in him, not having mine own righteousness, which is of the law, but that which is through the faith of Christ, the righteousness which is of God by faith.  Philippians 3:9

-> 한국어 성경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했지만 킹제임스는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 믿음에 의한 하나님의 의 안에서 발견된 나라는 것이다. 



4.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 3:22

Even the righteousness of God which is by Faith of Jesus Christ unto all and upon all them that believe : for there is no difference.  Romans3:22

 

로마서 3장 22절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자.

박진영이 말하고자 한 믿어짐과, 믿었다의 구분이 여기에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한국어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라고 나왔지만 그것은 나의 의지에 의한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곧 '예수 그리스도, 곧 그분의 믿음'이다. 그 믿음에 의한 하나님의 의가 '믿는' 모든 자들에게 오는(unto) 것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의 믿는 행위나 의지만이 아니라 거기에 더해 예수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신 것이다. 

 

이것을 두고 유튜브에 올라온 신학자들은 박진영이 믿음을 1~3단계로 나눴다고 비판하나, 박진영은 믿음의 단계를 말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주어졌다는 확실한 사실을 이야기했고, '믿음이 주어진 자들'을 일컬어 구원받은 자들이라고 지칭했다. 그래서 언론에 공개한 자신의 간증에 어느 날을 지칭해 그것이 믿어졌다고 말한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틀렸다고 말하겠는가. 그것을 비판해 올린 유튜브에 나온 사람들이, 사회를 본 사람의 질문 "그럼 당신들은 구원을 무엇이라고 보느냐"는 질문에 말 돌리기나 하고 '우리가 말하는 구원은 이것입니다'라고 확실하게 말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 아닌가? 바울 사도가 줄기차게 말하는 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을 박진영이 말하는데 이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바울의 회심이 가능했던 다메섹 도상의 역사. 성경에는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라고 표현됐고 바울은 그 자리에서 땅에 엎드러져 예수의 목소리를 듣는다. 

 

성경이 말하는 바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골 1:14)"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시 32:1)"들이다. 그것을 감사함으로 깨달아 믿었다는 표현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부정하는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칼 바르트가 '로마서'에서 쓴 이 말을 뜻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가장 정직한 원함을 통해서도

단지 선이 자기 안에 없음만을 계속해서 깨달을 수밖에 없는 존재,

 

나는 누구인가.

 

 

아무리 원해도 안 되는 나를, 아무리 선하고자 해도 안 되는 이 죄인을, 아무리 믿고자 해도 또 의심하는 나는 무엇으로 의롭게 되는가. 칼 바르트는 순종을 말하고, 믿음을 이야기하며 그 가능성은 오직 하나님의 가능성 안에서 가능하게 된다고 줄기차게 이야기한다. 박진영은 책 '무엇을 위해 살죠'에서 이것을 강조한다. 

 

박진영은 믿음의 확실함을 이야기한다. 확실한 믿음을 이야기한다.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믿음의 경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을 모든 사람이 알기를 원한다. 박진영이 어느 교파, 어느 조직에 속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믿음이 중요한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믿음이 나에게 주어졌는가 이것이 중요하다. 바울 사도의 다메섹 이전과 이후가 중요한 것이다. 완전한 변화는 나의 의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한 변화이다. 그 변화가 감옥에서 건짐을 받은 자의 이전과 이후이며, 불 가운데서 건짐을 받은 자가 얻는,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변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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