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과거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다.
이미 끝까지 다 읽었기에 부담 없이 몇 장만 읽어볼 심상으로.
새 책이라면 당연히 처음부터 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책들은 그런 강박이 필요 없다.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일까. 다시 읽는 책은 뜻밖의 감동과 교훈을 선사한다. '여유로움' 속에서 진짜로 작가의 진면목을 보는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빅터 프랭클의 유명한 책 '죽음의 수용소'를 다시 읽고 있다.
초반 몇 장을 읽는데, 아.. 이런 책이었구나. 나는 다시 한번 놀란다. 전체 줄거리는 기억에 남지만 세세한 것들은 모두 처음 읽는 듯 느껴졌다. 이 책이 아우슈비츠의 비참함을 인간이 어떻게 견디는지, 정신학적으로 분석한 책이라는 것은 알았어도, 책의 세세한 스토리는 완전히 처음 읽는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읽는 내내 내 정신은 여러 복잡한 생각들로 뒤엉켜 있었지만, 곧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뒤엉킨 생각들. 과거들. 다 부질없다.
지금 내게 중요한 건 바로 이 시간이고,
그리고 살아있음이다.
건강의 비결은 '잡념'을 없애는 것이라고 한다. 밤만 되면 몸뚱아리 속에서 떠오르는 온갖 잡념들이 사람을 망친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매일 저녁마다 지나칠 정도로 유도를 했고, 비 오듯 땀을 뺐다. 그럼 신기하게도 정신이 맑아졌고, 몸도 가벼워졌다. 그렇게 매일 밤을 주말 아침을 맞는 것처럼 편히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유도장에 가지 못하게 되면서 나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은 강도의 운동에 만족해야 했다. 결국 낮 동안 엄청난 정보에 시달린 뇌는 잡념들로 가득 찬 채 밤 시간 나와 함께 하게 됐다.
어떻게 정신을 바로 잡아야 하나.
정신과의 싸움은 누구에게나 있고 보통 일도 아니다. 특히 직장이라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다음 날, 또 그 다음 날도 버티기 위해 어떻게 온전한 정신을 가질 것인가 하는 이 문제도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그렇기에 우린 결국 좀 더 우리에게 적합하고 유용하며 지혜로운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와중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를 다시 읽으니 이런 고민조차 부질없는 것이구나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왜냐. 모든 걸 빼앗기고만 수용소의 사람들을 생각하니 그렇다는 것이다. 그들은 고압 전선에 자신을 던질 쉬운 자살마저도 선택하지 않았다. 당연하지 않은가. 힘이 빠지면 알아서 가스실로 보내줄 텐데 왜 수고를 더하겠는가. 이런 비참한 순간들에서도 빅터 프랭클도 '웃었고' 그리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이 스토리들을 적었다.
이야말로 기적인 것이다. 하루하루 버티는 것이 기적인 것이다. 적응이야말로 말할 수 없는 기적인 것이다. 나는 오늘 하루도 기적을 경험했고, 내일도 그럴 것이다. 그렇게 나의 현 시간이 금보다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위대한 삶의 과정이 이 책에 상세히, 그리고 매우 문학적으로 표현돼 있다.
www.ted.com/talks/viktor_frankl_why_believe_in_others?language=ja
(책과 무관한 영상이나, 빅터 프랭클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는 들어보라. 나는 이 목소리에서 포기하지 않는 한 인간을 느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인간을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는 존재로 묘사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이 사실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물론입니다. 인간은 어떤 환경에도 적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에 대해서는 묻지 말아 주십시오."
나는 생각했다. 내 상황을 여러 각도로 비교해봤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지금 비록 추운 겨울이나, 나는 따뜻하다. 비록 조금 부족하나, 이것도 풍족하다. 부자는 아니지만, 충분히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다. 무엇이 후회되는가.
세상 모든 것은 상대적이고, 그 사실만이 절대적이다. 부족하고 화가 나는 과거는 현재의 나를 괴롭힐 수 없다. 지금의 나는 잘 살고 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사실. '살아있다'는 자체가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 진실이다.
나는 이번 주도 버틸 힘을 갖게 된다. 사람은 어떤 것에도 적응할 수 있는 존재다. 생명은 그렇게 강인하다. 이 시간 살아있음에 나는 감사하다. 나는 기적을 느낀다.
'독서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올해도 해외여행 못 간다면 오르한 파묵 함께 (0) | 2021.02.22 |
---|---|
E.P. 샌더스의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 (0) | 2021.02.20 |
도올 김용옥의 '노자가 옳았다'를 읽고 (0) | 2021.02.04 |
박진영의 책 '무엇을 위해 살죠'에 대한 변명 (0) | 2020.09.12 |
직장생활이 힘들 때 '디오게네스'에게로 (10) | 2020.03.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