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한 파묵의 로드 road 소설로 유명한 '새로운 인생'.
이 책에 나오는 "한 권의 책,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라는 표현처럼 나는 파묵의 이 책으로 타인을 바라보는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기차의 전조등 불빛이 철교의 벽에 반사되고 있었다. 역에 접근했을 때 잠잠해진 듯하다가 다시금 충격적이고 멈출 수 없는 힘으로 연기와 먼지를 일으키며, 서로를 껴안고 있는 우리 두 연약한 생명체 앞으로 기차는 지나갔다. 뒤에 남겨 놓은 더 인간적인 굉음 속에서 칙칙폭폭 하며 지나가는 객차에 기대어 앉은 여행객들을 보았다. 의자에 기대어 앉은 사람, 창에 기댄 사람, 재킷을 거는 사람, 담배를 피우는 사람, 우리를 보지 못한 여행객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미끄러져 갔다. 기차가 남겨 놓은 가벼운 바람과 정적 속에서 마지막 객차 뒤편의 빨간 불빛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오르한 파묵의 '새로운 인생' p.348
어릴 적 나는 차 뒷좌석에 앉아서 마치 풀 수 없는 문제를 만난 것처럼 생각에 빠지기 일쑤였다. 막히는 고속도로에서 더욱 그러했다. 차창 밖에 보이는 수많은 차들과 사람들. 그들도 나처럼 몇 시간 뒤 어딘가에서 새로운 시간을 보낼 것인가. 내가 모르는 장소와 시간이 당연할 것이란 전제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공식처럼 여겨졌다. 우연에 바탕한 삶들이 끝없이 이어진다는 것이 광활한 우주처럼 어린 내겐 오묘했던 것이다.
나는 이런 궁금증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그저 밖을 바라보며 타인에 대해 생각에 잠겼다. 그 덕에 서른이 넘은 지금, 나는 길에서 보이는 모든 사람들의 모습을 쉽게 지나치지 못한다. 그렇게 나는 타인의 관찰하는 사람이 됐고 그 인생들을 소중하게 봐야 한다는 당연한 생각을 한다. 그들과 나는 다를 바 없는 진짜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에. 무엇을 가지고 귀천과 높낮음을 기준 삼을 것인가.
그와 마찬가지로 이 소설도 타인의 삶, 특히 고통받고 상처 받은 약자에게로 모든 것이 향해 있다. 여행 중인 주인공의 시선에 비친 타인들은 언제나 운명 앞에 점점 약해지는 인생들이었다. 꼬일 대로 꼬여버린 채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인생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주인공과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게 표현돼 있는지 모른다.
왜 우리가 지금 이 순간 행복한 것인지 아느냐고 묻고 싶었다. 서로를 거리낌 없이 사랑하는 사람들처럼 온몸으로 껴안고 립스틱보다 더 빨갛고, 죽임이 삶보다 더 인자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귀여운 여인, 아버지의 주검 앞에 서서 인형을 들고 별을 바라보는 운 좋은 아이, 너에게 묻는다. 이 충만함과 완벽함을 우리에게 선사한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는 언제나 여행을 해왔다. 그 여행은 많은 것을 알려줬다. 여행 중 쓴 글과 감정은 또한 평소의 것과 완전히 달랐다. 그것은 루틴 한 일상을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감정, 그로 인해 떠오르는 생각들은 보다 깊고 따뜻하며 세심한 통찰력을 갖게 한다. 특히 해외여행은 익숙한 장소를 벗어나 낯선 곳과 사람 속으로 나를 던지는 행위기 때문에, 그래서 여행객들은 인생의 새 맛을 느끼는 것이라 본다.
우리는 여행 중 마주치는 작은 인생들을 쉽게 지나치지 못하는 것을 느끼곤 한다. 장사꾼의 미소 하나까지도. 길에서 휴지를 줍는 노인까지도. 어릴 적 내가 느꼈던 감정을 여행 중 누구나 느끼는 것이다. 내가 진리라 여기며 집착하고 인내하며 버티던 이 삶이 아무것도 아니구나를 깨닫는다. 수천만 리 떨어진 곳에서 다른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도 다들 그럭저럭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해외여행을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못하는 시절이다. 2020년엔 당연했고 2021년도 힘들게 됐다.
그럴 때일수록 나는 이런 책이 위안을 준다고 생각한다. 여행은 못 가지만 이때를 이용해 여행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추후 가게 될 새로운 장소는 더욱 의미가 깊어지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여행을 가서도 이동 장소에 대한 고민과 사진 기록을 위한 분주함만 반복될 뿐이다. 여행이 타인을 바라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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