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 김용옥 선생의 '동경대전'에 시인 김지하에 대한 평이 나와 반가움과 놀라움을 느낀다. 도올은 김지하 시인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우리나라에서 동학을 실천적인 가치로서 민중들의 심성에 배양시킨 최초의 사상가는 시인 김지하였다. 김지하는 동경대전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었고, 특히 해월 최시형의 실천적 생애와 사상에 관한 매우 적확하고도 심오한 통찰이 있었다. 그는 '생명사상'이라고 하는 자신의 사상적 틀 속에서 동학을 바라보았고, 그러한 동학의 이해방식은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1970·80년대 반군사독재투쟁의 사상적 토양이 되었다.
동학대전 p.16
6~7년 전 나는 3대 일간지 중 한 곳에서 인턴기자를 했다. 그곳의 한 부장이 김지하 시인을 인터뷰하러 주말을 이용해 원주로 갔고 나도 동행했다. '토지'를 쓴 박경리 선생이 기거했던 토지문화관에 도착하자 밤이었다. 박경리 선생의 따님이 우리를 맞이했다. 김지하 시인은 없었다. 한참을 기다리자 김지하 시인이 나타났다. 우리를 보고 상당히 놀라는 표정이었다. 애초에 시인은 인터뷰를 거절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기자가 어떻게든 시인을 만나러 갔던 것이다. 그런 상황임에도 시인은 처음 본 우리를 문전박대가 아니라 숨기려는 듯한 반가움으로 대했다.
그가 밤늦게 토지문화관에 도착한 이유를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그는 신들린 듯 홀로 강원도 산과 물을 헤매고 다녔다. 그는 우리 앞에서 밤늦도록 동학과 맑스에 대해 거침없이 쏟아냈다. 표현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시적 표현으로 가득했다. 노쇠한 시인이 아니라 생명 넘치는 젊은 시인이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인터뷰는 신문 두 면에 걸쳐 나왔다.
기사가 나온 뒤 나는 부장과 함께 다시 원주를 찾았다. 산골짝 어느 음식점에서 김지하 시인을 만났다. 그는 그 식당 주인에게 상당한 정을 가진 것 같았다. 50대로 보이는 음식점 주인도 시인을 깍뜻하게 모셨다. 몇 번 본 것도 아니지만, 나로서는 김지하 시인이 누군가를 따뜻하게 대한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다. 인터넷에서 어떤 영상을 찾아봐도 김지하 시인은 매우 날카롭다. 특히 시인은 '오적'에 대해 세상 둘도 없는 날카로움이었다. 하지만 이름 모를 서민들에겐 최선의 따뜻함이었다. 그렇게 나는 김지하 시인을 존경하게 됐고, 지금도 그렇다.
당시 김지하 시인은 도올 김용옥 선생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이야기했다. 좋은 평은 아니었으나 도올의 전국민적 활동을 이야기했다. 도올 선생이 이번 동경대전에서 김지하 시인을 높게 평하는 것을 보며 시인 앞에서 한 마디도 못했던 인턴기자였던, 지금도 영향력 없는 평민인 나는 거인들이 사상 투쟁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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