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보다 강해졌다고 느끼는 것
- 또는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기쁨 - 은 비교하는 것을 항상 전제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교는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가 아니라 성장하는 과정 중에 있는 자기 자신과의 비교다.)
니체의 [힘에의 의지] 917번
요즘 와서 느끼는 것은 니체가 말한 것 중에 옳은 것이 많다는 점이다.
니체가 쉽게 무시당하는 이유는 '신은 죽었다 Gott ist tot'라는 외침 단 하나 때문이다. 하지만 이 외침에 대해 성경을 수십 번 읽어온 나로서는 아찔하고 해석하기 힘든 무언가를 느낀다. 이 말이 니체의 다른 말과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지에 충실하라
나체는 '신은 죽었다'만 말하지 않았다.
'대지에 충실하라'라고도 했다. 니체는 신과 땅에 대해 말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에 대해 말한다. 하나의 가치에 대해선 죽음의 선포를, 다른 하나에 대해선 생명의 삶을 주창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절대적 가치라는 게 있는가? 이것이 니체의 고민이다. 그가 내린 결론은 간단하다. 우선 눈에 보이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말자는 것. 함부로 나를 노예화 하지 말자는 것. 죽음 이후의 삶만을 가치 있게 하고 현재는 무의미하게 바라보다간 현실을 오직 비극적으로 보는 결과를 만들 수 있다는 것. 허무주의가 불현듯 자신을 갉아먹어도 그것을 심지어 감사하기에까지 이르는, 의지가 사라진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니체의 말이다. 현 삶의 고귀함은 허공 중에 다 바쳐진다.
그래서 '신은 죽었다'라는 말은 처절한 외침인 것이다.
니체가 말한 것 중엔 다소 논쟁적이고, 받아들일 수 없는 말들이 많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의 정신에서 배울 점은 훨씬 더 많다.
그는 '힘에의 의지'를 말한다.
이 말은 곧 자신의 운명, 현 상태, 현실에 좌절하지 말고 맞서 싸우라는 말이다. 그 발단이 곧 의지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의지 자체가 힘이 된다는 것이다. 그 힘이 내 안에 존재하기에 그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멀리하고 심지어는 죽이라는 게 '신은 죽었다'의 본래 의미이다. 이 표현이 비록 과격해 보일지 몰라도 곱씹어볼 이유는 충분히 있다. '나'를 우선 고귀하게 보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자긍심이 사라진 정신에서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힘에의 의지'를 말한 니체를 통해 나는 사랑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이겨낼 힘은 분명 네 안에 존재한다"
아픔을 자랑하고 다니는 자들이 있다. 사소한 병듦을 광고하고 다니는 자들이 있다. 심지어 우울증을 자랑스럽게 말한다. 내 주변에 그런 자들이 많은 것을 나는 느낀다. 그럴 때마다 나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런 약해 빠진 정신 상태를 가졌다는 게 화가 난다.
왜 그래야하는가. 아픔은 자기를 돌아볼 매우 귀한 시간임에 틀림없지만, 타인에게 의지하는 방편으로 잘못 쓰일 수가 있다. 보통은 후반부를 더 선호한다. 아픔은 약함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니체는 다른 것을 말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가꾸고 보살피라고 강조한다. 그는 미래를 말하지 않는다. 천국을 말하지 않는다. 현실을 말한다. 몸의 감각을 말한다. 운명적 약함에서 벗어나길 원한다. 병과 아픔을 신이 준 선물이라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노예 도덕을 버리라는 말이다.
나의 20대에 가장 사랑했던 사람과 주말 햇살 좋은 날에 카페에 앉았는데, 그녀는 이렇게 물었다. "그런 니체를 이해하면서 신앙과 믿음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있느냐." 나는 말했다. 니체를 이해하니까 바울을 더 이해하게 된다. 니체를 통해 훨씬 더 강한 복음의 전도를 할 수 있게 됐다.
사람을 많이 만나는 직업을 가진 나는 누구를 만나든 정신과 육체의 건강을 이야기한다. 바울을 말하면 일단 무시하고 보던 사람도 니체를 말하면 꿈뻑 죽었다. 그것을 나는 이용한다.
니체나 바울이나 보이지 않는 생명의 발돋움을 말한다. 나는 거기에 내재된 신의 성품을 아낌없이, 느끼는 대로 이야기한다. 그것을 사람들은 신기함과 즐거움으로 듣는다. 그런 방법으로 신앙을 되찾은 사람들이 있다. 그럼 나는 또한 위로와 기쁨을 느낀다. 니체가 말한 것은 '성장하는 기쁨'이다. '강해지는 기쁨'이다. 나는 그것을 공유함으로써 기쁨을 느낀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이 말을 하고픈 충동을 느낀다. 우리 아프지 말자. 함부로 우울해지지 말자. 힘을 내보자. 죽을 때까지. 바울이 끊임없이 외친 '기뻐하라'가 이와 다를 게 무엇인가.
말없이 떠난 친구에게 이 말을 못 해 미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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