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누구인가.
먼저 바울의 간증을 보자.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 오일을 유할 쌔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갈 1:13-19
여기서 특색 있는 말씀이 있다면 이 말씀이다.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삼년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Neither wern I up to Jerusalem to them which were apostles before me but I went to Arabia, and returned again unto Damascus.
다메섹 도상에서 빛을 본 후 변화를 받은 바울이 아라비아로 갔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갈라디아서 4장 25절에 보면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이 나온다. 바울은 그곳에 갔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왔고 그 후 삼 년이 지나 예루살렘에 가서 게바와 주의 형제 야고보(James the Lord's brother)를 만났다. 주의 남형제 야고보에 대한 것은 추후 자세히 설명하겠다. 야고보서의 저자와 관련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많다. 시내산이 있는 아라비아에 가던 바울은 다시 돌아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게 됨 justified by the faith'을 전파했다. 그것이 터키와 그리스 로마로 퍼져나갔고 그렇게 믿음을 바탕으로 한 초대교회 시대를 열 수 있었다.
바울이 말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워짐'이 명확히 드러난 서신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다. 갈라디아서야말로 행함과 믿음 중 어떤 것이 사람을 진정으로 의롭게 하는지 명확하게 설명한 서신이라 할 수 있다. 로마서는 바울의 총체적 신앙이 종합돼 있는 서신이다. 그 어떤 책보다 의로워짐에 대한 깊이 있는 바울의 생각이 함축됐다 할 수 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로마서를 바울의 '유언서'라 설명한다.
바울은 분명 죄를 범죄로 보는 개념을 주장했으며, 이런 정의를 롬 1-3장에서 폭넓게 활용한다. 하지만 바울이 생각하는 죄의 주된 개념은 죄를 어떤 힘으로 보는 것이다.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그 힘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어야 한다. 사람은 죄를 주主로 섬김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섬김으로 옮겨가야 한다.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 440.p |
나는 최근 E.P. 샌더스 박사의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을 읽었다.
원래는 1176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원본이 있다. 내가 읽은 것은 567페이지에 달하는 간추린 판이다. 간추린 판인지도 모르고 사서 읽어 처음에는 잘못 샀다고 생각했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그런 아쉬움을 떨쳐낼 수 있었다. 간추린 판이 정성을 다해 샌더스 박사의 생각과 사상을 명확하게 드러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를 통해 바울 관한 이 책의 중요 부분을 원본을 통해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부여해 효율적 독서를 하게 했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보다 명확하게 알게 됐다는 점이 무척이나 기쁘다. 예를 들어 '믿음으로만 가능한 의롭게 됨'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됐다. 바울은 개인의 행위에 의한 의로워짐을 설명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직 수동태로써 '해주심에 의한 의로워짐'을 설명한 것이다.
우리가 믿어서 의로워진 것인가?
나의 의지의 결과로써 의인이 된 것인가? 아니다. 바울이 말하는 바를 총체적으로 볼 때 오히려 그 반대다. 예수의 십자가 희생으로써 나는 '의로워 진 것'이다. 믿음 또한 내 힘과 노력과는 무관하다. 성경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는 것을 우리는 유심히 살펴야 한다.
믿음이 온 후로
after faith has come
믿음이 오기 전에
before faith came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
each one a measure of faith
이 표현들을 보면 주어진 '믿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의 의지와 생각과 행위로써 '믿었다'가 아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음으로 believe 말미암는 구원이라는 표현도 맞다.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그 믿는 것 또한 나의 노력의 산물이 아니다. 로마서와 에베소서는 그 믿음도 은혜로써 가능하다고 말한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엡 2:809
노력과 의지로써가 아니라 오직 은혜로써다. 우리는 그렇게 의로워진다. 우리의 의로움 없이 주어진 의라는 것이다. 이 구분이 얼마나 중요한가. 내 행위가 없기 때문에 은혜가 되는 것이다. 아무런 공로 없이 오직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한 죄사함이기 때문이다.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라는 =책은 특히 예수 그리스도에 속해 있다는 표현에 대해서도 심도 있게 설명한다. 우리가 죄에서 옮겨져 하나님에게 속해졌다는 의미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한다. 물론 이 책의 중간 부분까지 유대교에 대해 말하면서 유대교는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종교라는 일반적인 시각에 대해 반대하는 주장을 한다. 유대인의 제사가 행위를 담보하지만 그곳에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시각이 더욱 강하다는 것이다. 이 부분도 나는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구원의 의미에 대해 헷갈려하는 사람들이 많다. 십사만사천에 들어가야 구원을 받는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교리를 전파하는 자들이 있다. 구원얻음에 행동을 중시하는 경우도 있다. 바울은 그러지 않았다. 일체의 행위를 거부했다. 오직 믿음으로 가능한 구원을 말했다.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믿음 말이다. 일체의 구분과 구별이 없는 믿음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에게 속하게 됐다는 이 진리가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종교는 사람을 억압할 뿐이다.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할 이 진리가 사이비 기독교로 인해 방해받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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