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병이 없는 직장인이 있을까. 아마 한 명도 없을 것이다. 흔히 '경제적 자유'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찌 보며 이 월요병에서의 탈출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곧 노동으로부터의 자유를 원한다는 말이 모두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노동을 하고 있는 한 월요병은 언제나 찾아온다는 말과도 같다.
월요병이 참으로 힘든 이유는 내 마음에 노동의 시작을 알리기 때문이다. 결국 월요병은 이름과 달리 일요일부터 시작하게 된다. 심적 압박으로 일요일부터 다가오다. 직장인이라면 잘 알겠지만 이 심적 압박은 일에서부터 오는 부담도 있겠지만 대부분 '누군가' 때문에 발생한다. 나와 맞지 않은 사람과 일을 해야 한다는 그 압박 말이다. 보기만 해도, 말만 섞어도 스트레스가 쌓이는 누군가와 한 공간에서 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가. 보통은 이것을 견디지 못하고 일을 그만둔다. 버티다가 몸에 병이 생기기도 한다. 날로 심해지는 월요병은 쉽게 볼 일이다.
그런데 왜 뜬금없이 영국 철학자 존 로크냐라는 의문이 들 것이다. 그런데 삶의 지혜가 가끔은 '뜬금없는 것'에서부터 나타나는 경우가 있지 않던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위안과 혜안을 주는 지혜는 무언가 해결책이 필요할 때 불현듯 예기치 못한 곳에서 발생하기도 한다.
존 로크의 철학을 읽으며 월요병에 대해 생각을 했던 이유도 비슷하다. 지긋지긋한 월요병, 일하기 싫은 이 감정을 어떻게 할 것이냐를 두고 고민하던 차였기에 이런 연결점을 그려본 것 같다.
로크의 가장 유명한 책은 '인간 오성론'이다. 이 책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나 가장 큰 주제는 인간의 '경험'이다. 로크 전까지는 형이상학적이라는 애매모호하고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드는 이야기가 철학의 중심이었다. 실체냐 현상이냐를 두고 얼마나 복잡했는지 모를 지경이다. 눈에 보이는 물체를 두고도 실체가 아니라고 하니, 로크가 더 이상 그런 이야기는 그만 두고 경험을 중시하자고 할만도 했다. 그는 그의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이 아니라 확실하고 명확한 경험에서 철학적 사고를 하고자 했다. 러셀도 그런 로크에 대해 "로크는 대체로 형이상학을 경멸한다"고 썼다.
경험에 의거한 그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자유주의'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 자유라는 것을 그는 '온전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의 불완전함 속에서 자유를 인정하고 이해했다. 앞선 영국의 철학자였던 홉스는 달랐다. 인간의 불완전한 것을 악으로 봤다. 리바이어던도 그 악을 제거하는 한 도구면서 장치였다. 홉스는 인간의 불완전함을 이해할 대상으로 보지 않고 타도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를 통제하는 왕권에 의한 통치가 중요했다. 그 권력에 대한 항명도 인정할 수 없었다. 인간은 그냥 놔두면 '만인의 투쟁' 속에서 서로 죽이는 짐승일 뿐이라고 본 것이다.
로크는 달랐다. 그는 인간의 불완전함 속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봤다. 나 자신도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내가 진리라고 여기는 것도 불완전한 사고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상대방이 얼마든지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불완전한 사상과 생각들은 기본적으로 인정되어야 하고, 개인에게 어떤 사상이든 가질 자유도 당연히 존재한다. 로크로부터 민주주의와 프랑스, 미국의 혁명이 가능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인간의 불완점함을 인정한 가운데 나온 자유주의를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러셀이 로크의 사상에 대해 해석한 부분을 읽어보면 좀 더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로크)는 우리가 종종 확실성에 미치지 못하는 개연성에 의지하여 행동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 다음, 이러한 고려에 따른 올바른 습관은 '서로 자비와 인내로 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이 진리라고 생각한 것에 대해 확실하고 의심이 불가능한 증거를 대지 못하면서 각자 자신의 의견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략) 너의 의견을 받아들이도록 만들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치자. 상대가 찬성한다고 의사를 표하기 전에 먼저 검토하는 습관을 지닌 사람이라면, 너는 당연히 여유를 주어 검토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상대는 너의 의견을 재차 따져보고 자신의 생각과 다른 면을 떠올리며 상세한 내용을 검토하고 나서 어느 편이 유리한지 살펴볼 테니 말이다.
서양철학사 p.765~766
다른 사람들이 의견을 포기하고 우리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더라도, 완고한 고집불통에 괴팍한 별종이라도 곧바로 몰아붙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포용하지 않아서 그들과 마찬가지로 완고한 고집쟁이가 될 개연성이 높을 경우 상대에게 우리의 의견을 강요하는 셈이니 말이다.
p.766
나는 이 세 문단 안에서 월요병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한, 다시 말해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 중에 나와 맞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답이 될만한 내용을 발견했다. 결국 나와 의견을 달리 하는 사람이 상사든, 동료든, 후배든 상관 없이 나의 의견을 진지하고 차분하게, 그러면서 분명하게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 첫 번째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과 여유를 그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것을 그 사람이 받아들이든 아니든, 혹은 받아들일 만한 인격이 있든 없든 그 결과는 그 사람에게 남기고 압박하거나 윽박질러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를 일단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혹 상사가 나에게 부당한 태도를 보이거나 부당한 지시를 했을 경우 마냥 당하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분명하고 차분하게 나의 의견을 그 사람에게 전달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나의 의견을 받아들일지는 그 사람에게 맡기자는 말이다.
이 조차 하지 않으면 정말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힘든 점이 발생한다면 내가 그 사람과 함께 일하는 동안에는 이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포기하는 순간에는 누군가 그 회사를 나가야만, 혹은 서로가 다른 부서에 배치되어야만 문제가 해결되는 매우 지난한 시간들만 나에게 남을 뿐이다.
월요병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노동을 하는 한에 있어서는 없어지지 않을 수 있다. 월요병을 극복하는 방법도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그 원인이 대게는 사람 때문에 발생한다. 그럼 그 사람의 행동은 바꾸지 못해도 나는 한 가지는 선택할 수 있다. 로크가 강조한 것처럼 상세한 언어와 타당하고 합리적인 태도로 상대방을 설득하는 과정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만이 내가 정신적으로 그 사람보다 한층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고 지켜볼 수 있게 된다. 조급 해지는 쪽은 상대가 된다. 이런 '경험'들이 쌓여가면서 직장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대처 방법이 한층 지혜로워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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