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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우울증 치료 방법 '그리스인 조르바'와 함께

by 하 루 살 이 2020.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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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우울하다는 게 뭘까.

보통 사람들이 '우울하다, 우울하다'라고 표현하는데 과연 우울하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어떤 감정인 걸까. 우리는 어떤 상태일 때 '우울하다'라고 표현하긴 하는데, 정작 '그 상태'를 정확히 표현하기 쉽지 않다는 난점을 발견한다. 

 

'혹시, 우울하다는 감정 자체가 없는 건 아닐까'라고 되묻게 된다. 이 물음에서 많은 논쟁이 붙을 것이다. 다만 '명확히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은 한번 의심하고 넘어가도 손해 볼 것 없을 것이다. 혹시라도 실체없는 것에 내가 휩쓸리고 있다면 그것마큼 손해도 없으니까. 한 번쯤 의심해보고 그 후 실체를 발견한다 해도 본전이다. 그러나 실체도 없이 휩쓸리다면 손해일 뿐이니 의심도 해볼 만하지 않은가. 

 

 

물론 우울한 감정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인간은 우울할 수 있기에 위대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 한없이 행복하다고만 생각해보자.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 상태가 더 위험한 감정이다. 자신을 잃어버리기에 딱 알맞기 때문이다. 무언가에 도취되어 버린다는 것. 행복하다는 감정은 도취의 정도가 우울한 정도보다 훨씬 강하고 폭발적이며 파괴적일 수 있다. 로또에 당첨된 행복한 사람의 말년이 어떠한지 우리는 잘 알지 않은가. 현실을 잃어버린다는 점과 관련해 무한한 행복처럼 위험한 건 없을 것이다.

 

행복이나 불행이나 지나치게 집중할 필요가 없다. 실패해도 극단적으로 좌절하고 후회할 필요가 없고 반대로 성공해도 조용하고 잠잠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상태가 가장 좋은 건강한 상태라고 생각한다. 잠잠한 상태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미래를 계획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 같은 경우에 책을 좋아한다. 한 책을 오래 보는 타입이다. 지구력이 부족한 것 같다. 그런 나에게 있어 장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책 속의 진주를 발견하는 재주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그런 진주들을 찾아 모을 수 있었다. 삶을 대하는 태도와 관점의 변화가 그것이다. 

 

 

 

전에는 그토록 나를 매혹하던 시편들이 그날 아침에는 느닷없이 지적인 광대놀음, 세련된 사기극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가. 문명의 사양은 그렇게 되기 마련인 것이다. 인간의 고뇌는 정교하게 짠 속임수, 순수시, 순수 음악, 순수 사고 속에서 그렇게 끝나기 마련인 것이다. 

그리스인 조르바 p.196

 

재수 없는 사람은 자기의 초라한 존재 밖에도 자만하는 장벽을 쌓는 사람이다. 거기에 안주하며 삶의 하찮은 질서와 안녕을 그 속에서 구가하려 한다. (중략) 하지만 미지의 세계로부터 공격이 차단된 하찮은 확신의 테두리 안에서 지네처럼 꼼지락거리다 보며 아무 도전도 받을 수 없다. 숙명적인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 되는 강력한 적은 오직 하나, 터무니없는 확신뿐이다. 

그리스인 조르바 p.424

 

위 두 문장을 다시 말하자면, 이 세상에 진리라고 여긴 것도 내일이 오면 하찮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을 흔히 쉽게 말하듯 '진리는 없다'라고만 표현할 게 아니다. '내 감정이란 것은 이렇게 쉽게 변화하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해 봐야한다. '공포와 증오의 적'은 다른 게 아니다. 나의 '확신'에 있는 것이다. 그것이 나를 모든 것으로부터 차단하는 장벽이 될 수 있다.

 

나는 망했어,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 내 삶을 망쳤어

 

이런 확신에 찬 단어들은 특히나 좌절스럽고 우울한 상태일 때 더욱 강하게 나타나는 법이다. 그래서 우울한 것이 위험한 것이다. 나를 확신에 차게 만들어 극단의 생각을 내 생각 안에 허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확신에 가득 찼던 사람이 바로 이 소설 속의 책벌레, 주인공이다. 그 반대에 서서 날마다 뜨는 태양 아래서 매일 보는 자연을 통해서도 신비로움을 느낀 인물이 바로 조르바다. 우리는 그 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람이 살다 보면 얼마든지 우울할 수 있다. 가장 아끼던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고, 그 잃어짐의 대상이 가족이든 연인이든, 재산이든 직장이든 뭐가 됐든 간에 나에게는 소중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그런 나의 '확신에 찼던 것'들이 내일이 되고 모레가 되고, 일 년이 되고 십 년이 됐다고 했을 때 어떻게 될지 생각해야 한다. 그때 가서는 오히려 세상의 둘 도 없는 '터무니없는 확신'에 근거한 비실체적인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일 뿐이다. 

 

 

남들의 비난과 욕, 저주들이 자신을 괴롭힐 수도 있다. 대중의 사랑을 먹고사는 정치인들이나 연예인들이 특히 그럴 것이고, 명예욕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욱 그러할 수 있다. 혹은 과거의 잘못과 실수가 현재의 나를 발목 잡을 수 있다. 어떤 일이든 상관없다. 모두 나에게 힘든 일이고 나를 괴롭게 하는 일에서 만큼은 모두 같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삶을 포기하기에 이를 정도로 우울하거나 괴로워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울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모두가 나에게 괴로움을 주는 것이지만 사실은 모두 나의 기준과 기대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실망스러울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그 현상들도 감정들도 끝나기 마련인 것이다. 나의 확신이 언제고 계속 갈리 없다. 

 

 

그리스인 조르바가 택한 것은 그런 확신들이 나를 괴롭힐 때는 잠시 그곳에서, 그것에서 떠나는 일이다. 가능한 한 멀리, 최대한 멀리 말이다. 시간도 공간도 모두 벗어날 정도로 멀리 가서 새로움을 느끼는 것 말이다. 작은 것에 다시 기쁨음 느끼는 곳으로 말이다. 거기에서 어떤 일과 인연과 깨달음이 생길지 어떻게 아는가. 

 

우울증

 

그 실체는 불분명하고 정의하기는 더욱 어렵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있다는 이 사실 자체만은 분명한 실체이며 사실이다. 그것만큼 중요한 게 없다. '나'라는 생명은 나를 이루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니 불분명한 것에 집중돼 나타나는 불안한 생각보다 나 자신의 소중함을 깨닫고 작은 것에서부터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나에게 집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것이 가능한 곳에서 나의 시간을 채워가야 한다.  조르바처럼 말이다. 

 

문득 나는 환성을 질렀다.

내 앞의 움푹 파인 곳에 서 대담한 아몬드 나무가 한겨울에 꽃을 피우고  다른 나무를 앞서 봄을 알리고 있었다. 우울증에서 벗어난 기분이었다.  후추 냄새가 나는 대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러고는 길을 벗어나 꽃 핀 가지 밑에 주저앉았다. 무아지경으로 오래 거기 앉아 있었다. 해방된 마음은 행복했다. 영원과 같은 시간이었다.

 

나는 낙원의 나무 아래 앉아 있었던 셈이다.

 

그리스인 조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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