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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기자는 어떻게 기레기가 되는가

by 하 루 살 이 2019.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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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라는 부제도 있다는 것이다. 헤드라인의 폭력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그저 조금밖에 알지 못한다. 신문들이 정말 금수 같은 그들의 '무지함'으로 무엇을 야기할 수 있는지 한 번쯤 연구해 보는 것은 범죄학의 과제일 것이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중 '10년 후 하인리히 뵐의 후기'에 나온 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하인리히 뵐의 시대는 헤드라인의 폭력에 대해 강조할 만한 시대였다. 지금은 더 복잡하다. 그 폭력이 이제는 헤드라인을 넘어서, 신문지를 넘어서, 기사의 본문을 넘어서, 어디까지 뻗쳐나가는지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다. 우리는 위대한 인터넷 세상에 살고 있으니까 말이다.

 

포털의 알고리즘이 그 헤드라인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다면 그것은 언론의 헤드라인 폭력이 아니라 포털사가 운영하는 알고리즘의 폭력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 파괴력은 수류탄과 핵폭탄의 차이만큼이나 크다는 걸 우린 잘 안다. 언론 기사의 헤드라인은 이제는 단지 노리개에 불과할 뿐이다. 문제는 언론사들이 지금에 와서 이 사태를 반대로 이용한다는 점이다. 그 영악함은 천재적이기까지 하다. 다시 말해 헤드라인의 폭력성은 이제 종이 신문의 퇴출로 거의 힘을 못쓰게 된 언론이 인터넷과 포털의 힘을 빌려 그들 스스로 인터넷신문이라는 과거엔 듣도보도 못한 괴물로 재탄생된 결과물이라는 말이다.  

 

"우리 조선일보는 정권을 창출시킬 수도 있고 정권을 퇴출시킬 수도 있다"

 

이런 지적 무능력자들이나 할 법한 표현을 한 언론사 관계자가 했다니 놀랍지 않은가. 종이 신문 주제에 그런 말을 하다니. 그건 다름 아니라 인터넷과 포털의 무궁무진한 가능성 덕에 다 죽어가는 언론이 겨우 살아나더니 이제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됐다는 걸 표현한 것이다.  

 

하인리히 뵐은 그 지적 무능력자들에 대해 이런 말로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때도 이 괴물들이 항상 문제였다.  

 

신문 기자의 이런 끔찍한 '무지', 그렇다, 거의 아무것도 알지도 생각하지도 못하는 그(기자)의 무지함이 카타리나로 하여금 권총을 뽑아 들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수 있다. 

 

이 소설을 자세히 읽어볼 필요가 있다.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자의 무지함으로 피해를 당하고 고통을 받으면서도 기자는 거기에 대해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출처도 불분명한 성스러운 문구로서(진상은 양심을 팔아먹은 저질적인 문구로써) 자기를 위로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그런 저주의 위로가 스스로에게 가능하도록 언론 환경은 갈수록 튼튼하고 견고해지기 때문이다. 갈수록 누구도 어떤 항의를 통해서도, 어떤 법적인 항변을 통해서도 언론 기사로 당한 피해는 보상받을 수 없어지고 있다. 한번 나간 기사는 다시는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한 건의 기사는 백 건의 정정보도보다 막강한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여론이며 기사로 만들어진 비뚤어진 사람들의 인식이다.   

 

 

이 소설은 바로 그것을 고발한다.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화가 났다. 이 소설 속 피해가 내가 살고 있는 현재의 이 나라, 이 땅 위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는 매우 현실적인 우려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틀림없이 지금도 쉬지 않고 이뤄지고 있을 것이다. 그것에 분노를 느끼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카타리나 블룸에 대해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이미 기자는 이 여자를 범죄자로 규정하고 취재를 시작했다) 그녀를 가정부로 둔 변호사에게 물었다. 그리고 변호사는 이렇게 답했다. 

 

"카타리나는 매우 영리하고 이성적인 사람입니다."

그리고 기자는 이렇게 기사를 썼다.   

"(카타리나는) 얼음처럼 차고 계산적이다."

 

이 소설은 한 남자와 하룻밤 사랑에 빠진 여자를 지옥으로 끌어내리는 언론의 행태를 고발한다.

소설은 그래서 위대하다. 인간의 가능성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행동의 이유를 말하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한 여자가 어떻게 축제에서 만난 한 남자와 하룻밤 만에 사랑에 빠질 수 있는지, 그녀 자신의 잘못 없이도 그녀의 삶이 어떻게 그녀를 그 지경으로 만들었는지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왜 서른이 되도록 가정부로 살아야 했는지, 어떻게 가정부로서 강가가 보이는 아파트에서 살게 됐는지, 그녀의 성실함과 이성적인 행동들, 그리고 운 좋게 만난 마음씨 따뜻한 고용 부부들의 도움을 설명하며 이해시킨다.

 

법과 사회는 그런 것에 무관심하다. 언론은 무섭도록 무관심하다. 그리고 딱 하나에 관심을 둔다. 어떻게 해야 그 여자의 인생을 대서특필해서 온 세상 앞에 발가벗게 만들어 마녀로 만들 수 있을까. 언론이 가지는 가장 큰 관심사다. 그래야 많이 팔릴 테니까.  

 

카타리나 블룸이 바이츠메네와 뫼딩을 양옆에 두고 무장 경찰들의 엄호를 받으며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 그녀는 정면에서, 뒤에서, 옆에서 수차례 카메라 세례를 받았다. 결국 그녀는 부끄럽고 당혹스러워 자꾸 얼굴을 가리려 했고, 그 와중에 그녀의 핸드백, 화장품 케이스 그리고 두 권의 책과 필기도구가 들어 있는 비닐봉지와 부딪히면서 머리가 헝클어지고 표정은 불쾌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대로 사진에 찍혔다. '카타리나 브룲의 잃어버린 명예' p.23

 

카타리나 블룸은 그 남자가 살인을 저질렀는지, 강도짓을 했는지, 은행을 털었는지 몰랐다. 알 수도 없었다. 알 필요도 없었다. 그녀에게 그날 밤 한 남자가 나타났고 하룻밤에 사랑에 빠졌으며, 아침에 일어나니 그 남자는 사라졌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어진 풍경은 끔찍했다. 그녀의 외로운 삶은 언론에 의해 '살인자를 숨겨준, 살인자를 도피시킨, 살인자와 공모한 여자'로 바뀌었다. 

 

이것이 언론의 장기다. 그녀와 관계된 모든 인간들에 대한 취재도 언론사의 프레임에 맞춰 이뤄진다. 기자의 이미 정해놓은 답을 통과하면 모든 시각은 현실성을 잃어버리고 비뚤어진다. 제 아무리 그녀를 보호하려 한 지인들의 발언도 기사로 나가면 그녀를 죽이는 도구로 변했다. 언론은 그런 것이 가능하게 하는 살인 공장이었다. 

 

카타리나 블룸은 돌이킬 수 없게 파괴된 자신을 보고 기자를 향해 권총의 방아쇠를 당긴다. 법은 그런 그녀를 처벌했다. 하지만 소설가는 과연 누구를 처벌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그 질문이 이 소설을 만들었다. 방아쇠를 당기게 만든 책임자는 어디 있는가. 그 책임자를 처벌할 수 있는가. 과연 진짜 피해자는 누구인가. 피해를 되돌릴 방법이 있는가. 우리는 이 질문들 앞에 언제나 좌절감을 느낀다.  

 

 

언론이 사회적 감시망이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언론은, 특히 한국의 언론은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구조 자체가 그렇게 되어 있다. 언론이 먹고사는 이유는 다 알듯이 기업의 광고비 덕분이다. 기업의 입김에서 자유로운 언론사가 있을까. 사주와 데스크는 과연 기자의 '사회적 책임감'에 관심 있을까. 관심 있다고 하다면 그걸 우선시할까? 아니면 기업과의 '우대관계'를 우선시할까. 입만 번지르르한 데스크들은 기자들 앞에서 자기도 기자라며 책임을 느낀다고 할 것이다. 같은 편인 척할 것이다. 하지만 속은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다. 그들은 양의 탈을 쓴 늑대일 뿐이다. 우화적 표현이라 미안하다. 전달감이 떨어지는 것 같아 다시 쓴다. 그들은 양심을 팔아먹은 기생충이다. 

 

그럼 언론이 없어져야 맞냐고 물을 수 있다. 나는 언론은 없어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언론 없는 나라의 부정부패가 두렵다? 언론으로 인해 발생한 부정부패를 생각하면 더 두렵다. 지금까지 언론이 한 행태를 봐라. 불신을 조장하고 범죄를 부추기고 싸움을 유발하는 것이 지금의 언론이다. 그럼, 없어져도 된다. 지금은 위대한 인터넷을 통해 개인이 언론의 역할을 해내가고 있다. 기업의 부도덕한 행위만 아니라 정부 조직의 그러한 것까지 폭로하고 있다. 후원을 통한 언론사라면 존재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다만 외연 확장은 정말 어려울 것이다. 자유로운 언론은 이 역사에 나타난 적이 없다. 애초에 불가능했기에 기대를 말았어야 했다. 그걸 바라고 언론을 그냥 놔둔 결과가 무엇인가. '정권을 바꿀 자신감 넘치는' 조선일보나 나온 것 아닌가.  

 

 

하인리히 뵐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 폭력은 소설에 국한한 폭력이 아니다. 순수한 의미의 '폭력'이다. 없어져야 할 폭력이다. 그런데 언론을 자유롭게 놔둔 덕에 우리는 그 폭력에 언제나 노출되게 됐다. 언론 개혁이 아니다. 언론 폐쇄가 답이다. 결코 지나친 반응이 아니다. 진작에 말했어야 할 표현이다. 

 

범죄자를 사랑하는 여인들이 있다. 범죄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범죄자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빌어먹을 사실들. 차이퉁(소설 속 언론사)의 사실들 말이다. 차이퉁은 그들 자신들의 범죄 행위만 좋아하고, 만에 들지 않거나 분명하지 않은 사실은 모조리 조작한다. 심지어 조작되지 않은 사실조차 그 신문에서는 거짓말로 보이게 되어 완전히 거짓으로 흡수된다. 간단히 말해 그 신문은 진실을 '진실에 맞게' 재연해도 진실을 더럽힌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p.148

 

 

(차이퉁의) 무지한 비열함이 그녀를 완전히 파멸시킨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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