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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으로 말하다 18]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by 하 루 살 이 2020.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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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Give us this day our daily bread. 

 

나는 '주기도문'이라고 불리는 예수께서 알려주신 기도의 양식을 읽을 때마다, 마음 한쪽에 밀려드는 알기 힘든 감정을 느낀다. 사람들은 주기도문을 '외움'에 치중해 받아들이곤 한다. 달달 외우는 것이다. 하지만 외우는 것은 예수님 말씀의 본 뜻과 많이 다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외우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이런 방식', '이런 태도', '이런 양식'으로 기도하라는 가르침이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잘 읽어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In this manner, therefore, pray. 

 

 

영어로 보면 예수의 말씀은 '외우라'가 아니라 '이런 방식과 방법으로써' 기도하라는 '기도의 양식'을 알려주신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예수께서 알려주신 기도의 양식을 기초로 우리의 실정과 상황에 맞게 기도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것이다. 

 

나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한 마디 말씀에 집중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눅7:33~35

 

 

예수를 향해 비난하는 어떤 이들이 예수님을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라고 말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예수님은 분명 그러하셨다. 세관에 앉은 레위에게 '나를 좇으라'하셨던 그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레위가 예수를 위해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열었을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제자들에게 말한 것도 이것이다.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우리나라 말에 '식구'라는 말이 있다. 식구의 개념은 가족보다 더 널리 쓰인다. 같이 밥을 먹는 사람이라는 뜻이기에 가까운 누군가를 말할 때 '내 식구'라고 한다. 그들이 피를 나눈 형제는 아니나 분명 나와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이들로써 나의 가족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을 함축한다. 그만큼 함께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내가 찾아가 바라본 갈릴리 바다의 평온함. 이 들편을 바라보며 나는 '여기 어딘가에서 예수께서 배고픈 민중들을 향해 설교하시고 먹을 것을 나누어주시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에 빠지곤 했다.  

예수께서 움직이셨던 서기 30년대의 시대상은 이 '먹는 문제'를 해결하기 참 힘든 세상이었다. 역사적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은 400여 년 동안 제국의 전쟁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알렉산더 제국이 무너지고 제국은 4개로 나뉜 뒤 다시 2개의 대제국으로 경쟁하기 시작했다.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프톨레마이오스와 시리아와 터키로 세력을 뻗은 셀레쿠오스가 그러했다. 그들의 중심에 유대인이 있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땅을 가운데 두고 세력의 경쟁을 펼쳤다.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언제나 그렇듯 권력에 빌붙은 아첨꾼들은 먹고 살기 편했고, 권력에서 먼 민중은 언제나 약탈의 대상이었다.  

 

한국 국민이야말로 이 400여 년의 참혹함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 아니겠는가. 우리도 남과 북으로 나뉘어 서로 총을 겨누고 싸워야만 했다. 지금도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분단의 상황이다. 이 모든 불행은 대제국들의 세력 확장의 욕심의 결과물이었다. 그 경쟁의 경계선에 한반도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전쟁으로 우리는 대참사를 겪어야 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고 민중은 가난해졌으며, 먹는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는 가난에 모두가 처해야만 했다. 

 

예수 시절의 팔레스타인 민중들도 그랬다. 그들은 수백년을 제국의 전쟁 한 가운데서 고난 받았다. 결국 민중의 배고픔은 극에 달했을 것이고 그랬기에 그들은 먹을 것을 주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갔던 것이다. 민중이 예수님을 따라다닌 모습들을 한 번 떠올려보자. 그들은 배가 고픈 자들이었다. 먹을 것이 없는 굶주린 자들이었다. 그들은 오직 배고픈 민중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서 5천 명을 먹이시는 것을 보고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고(요 6:15)'까지 했던 것이다. 배고픔을 해결해주는 것만으로도 임금 됨이 충분했던 것이다. 

 

 

예수께서도 그런 자신을 따라다니는 '큰 무리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으며(마 14:14)' 저녁이 됐을 때 수많은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셨다. 성경에는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라 했으니, 여자와 아이들까지 다 합친다면 족히 1만 명은 넘었을 숫자였다. 그들은 배고프고 가난한 민중이었다. 오천명을 먹이신 사건 이후 사천 명을 또 먹이실 때도 예수께서는 그 무리를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마 15:32

 

예수님을 따라다닌 민중이야말로 하루의 양식을 구하는데 고민하고 살아야만 하는 이들이었다. 예수님을 따라다닌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셨던 이들은 다름 아닌 배고픈 이들이었으며 죄인 취급당하는 세리들이었으며, 병든 자들이었다. 다시 말해 먹지 못해 병들 수밖에 없는 가난한 자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전하신 기도의 방법 가운데, 한 마디 말씀이 울림이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하루 끼니 조차 해결할 수 없는 민중들에게 바로 이 기도를 알려주신 것이다. 산상수훈을 듣는 수많은 무리들이 이 기도의 가르침을 들을 때 마음속에 강한 전율이 일었을 것을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의 말씀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Man shall not live by bread alone, but by every word that proceeds from the mouth of God)'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나오는 영어 표현 'alone'을 생각해보자. 분명 예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도 살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진행되어 나오는(proceeds)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강조의 표현으로 이 단어가 쓰인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둘 다 중요한데, 특히 하나님의 말씀이 더 중요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또 다른 편에서 말하자면 예수님은 사람이 먹는 '일용한 양식'의 중요성도 결코 간과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우린 알 수 있다. 그러면서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신 말씀, 바로 생명의 양식을 요한복음에서 자세히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 6:33~35

 

이 때도 민중의 심정은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있었다. 예수님도 그들의 심정을 충분히 헤아리는 분이었다. 다만 진정한 원함은 영혼의 양식인 생명의 떡을 그들에게 제공하는 것이었다. 육신의 기본적 바람인 먹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을 때 그들은 비참하게 됐고 병들고 아프고 심지어는 귀신이 들려버리는 처참한 삶에 처해야 했다. 그러하듯, 생명의 음식에 굶주렸을 때 그 영혼은 얼마나 더 비참하겠는가. 얼마나 병들고 아프고 심지어는 자신의 영혼을 구하지 못하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이 모든 것을 생각해볼 때 예수님은 결코 민중의 육신적 배고픔이라는 현실 앞에서 말씀만으로 끝내시지 않으셨다. 먹을 것 또한 채워주셨다. 배고픈 민중들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바리새인들이나 율법자들처럼 입에 발린 소리만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생명의 말씀에 관해 전해 주셨다.  

 

우리의 삶도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의 삶이 궁핍하고 치명적인 가난에 처할 때 과연 우리가 성경 한 구절이라도 읽을 수 있을까. 일에서 돌아와 밤에 성경을 필 마음이라도 가질 있을까. 하루 종일 모질고 힘든 일을 하고 돌아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누워 자는 수준밖에 되지 않을 때, 우리의 눈에 성경이 들어올까. 성경을 펼치는 것이 큰 부담이 않을까. 삶의 여유가 없어지고 가난에 처할 때를 상상해보자.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이 말씀을 읽을 때 나는 삶의 미약함을 느끼는 감정으로 읽는다. 나도 같은 기도를 드리게 된다. 알 수 없는 미래,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미래의 시간들 앞에서 나는 너무나 약하기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기도드린다. 내가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비참한 가난에 처해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는 삶을 살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기도드린다. 가난이 더 무서운 것이 아니라 가난해져서 말씀을 읽을래야 읽을 수도 없는 그 삶이 더 무섭고 두려워서 나는 기도드린다. 그런 시간들에서 지켜주십사 나는 간절히 기도드린다. 진정한 일용한 양식인 말씀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내 삶과 시간들을 지켜달라고, 기도를 드린다. 

 

잠언의 한 구절 말씀처럼 말이다. 삶이 이어질수록 이 잠언의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조금씩 알아가는 것을 느낀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잠 30:7~9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Feed me with the food allotted to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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