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죽었다'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신이 무력해졌다는 것뿐 아니라, 인간이 복종해야만 하고 복종하고자 하는 '초감성적인 것'이 무력해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무력화는 이제까지의 질서가 붕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이데거의 '니체'
오랜 기간 하이데거가 쓴 '니체'를 포기하지 않고, 가끔은 즐거움으로, 또 가끔은 진지하게 읽고 있다. 하이데거의 '니체'는 총 두 권으로 이뤄졌다. 한 권당 500~600쪽에 달하는 방대한 책이다. 내용 자체가 니체와 하이데거의 철학이 융합돼 있어 차원 높은 기분을 준다. 그러다 보니 조금은 머리가 아플 수도 있지만, 니체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 지적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 또한 분명하다.
나는 이 책을 아도르노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함께 읽었다. 아도르노의 책이 강연집이다 그 책을 먼저 끝냈는데 다시 하이데거의 책을 읽으면서 우연한 두 권의 독서를 통해 칸트와 니체가 겹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칸트는 대상과 경험을 중시했다. 모든 것들을 우선 시공간의 구조를 통해 감성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다시 오성이라고 말하는 지성을 통해 개념화하는 과정을 설명했다. 그 안에 미리 주어진, 즉 선험적인 부분을 강조했으며 그것을 그렇게 길고도 복잡하게 이야기한 것이다.
나는 칸트를 통해 평등적 가치 교류가 무엇인지, 왜 인간은 그 자체만으로 위대한가를 생각할 수 있었다. 살아 있는 생명체 중에서 한 인간의 이성적 능력이 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그를 통해 한 사람 한 사람이 무시당할 수 없는 존재 가치를 가졌음을 알 수 있었다. 함부로 누군가를 무시할 수 없다는 말이다. 칸트가 신과 영원, 자유를 이율배반적이라고 해서 단순히 그를 무신론자라고 말하는 것은 순수이성비판을 매우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칸트는 그런 것을 무시하기 위해 책을 쓴 사람이 아니다. 오직 선험적 능력에 집중했던 사람이다. 그를 통해 인간의 위대함을 떠올렸던 한 사람이다. 신의 존재보다 한 인간의 가치를 확증해 내고자 한 철학자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니체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는 점이다.
니체는 생성의 가치를 믿었다.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인간은 자기만 아니라 자기의 운명까지 극복할 수 있다고 봤다. 여기서 보이는 그 극복의 힘이 인간 자신을 떼어놓고 말할 수 없는가. 니체는 아니라고 강조했다. 건강함, 발랄함, 의지, 희망 등 이런 가치들이 어떻게 나를 배제하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는 '신은 죽었다'라는 짤막한 명제를 통해 이 운동의 가장 본질적인 성격을 집약적으로 드러냈다. 이 명제가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신'은 존재자와 인간의 본분에 대한 그의 지배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교의 신'이란 동시에 '초감성적인 것' 일반과 그것에 대한 여러 해석, 즉 존재자 전체 '위'에 내걸리면서 존재자 전체에게 목적과 질서, 요컨대 의미를 부여하는 이상과 규범, 원칙과 규칙, 목표와 가치를 대표하는 명칭이다.
니체는 단순히 신은 죽었다라고만 말한 것이 아니다. 그는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의 위대함을 역설했다. 그것을 빼고 말하는 모든 규범과 가치 주장에 대해 역겨움을 느낀 철학자가 니체다. 그것을 좀 과격한 표현으로 해서 기독교인들의 반발을 샀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미친 취급을 아직도 당하는 것 아닌가 싶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생명의 소중함을 잊어버리고 보이지 않는 망상을 찬양하는 인간들의 추잡함을 떠올리면 나는 니체의 철학을 다시 한번 곱씹게 된다. 보이지 않는 신성으로 사람을 재단하려 들고 평가하고 나눠버리는 행태들을 나는 떠올린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피해와 폐해를 나는 기억한다. 그런 인간들의 수준 낮음을 개탄하고 싶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별것 아닐 것이다. 단순한데 진리가 있듯, 가까운 데 소중한 것이 있다. 내 주변에 보이는 모든 생명이 그것이다. 그것의 발현하는 과정이며, 고통을 이겨내고자 하고 위기를 극복하려는 그 힘이다. 그것은 당장이라도 창밖의 자연에서도 발견할 수 있으면 사랑하는 나의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나 자산에게서 느낄 수 있다. 나 자신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가를, 바로 이 시간 숨 쉬고 살고 있는 현실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나는 느낄 수 있다. 그것을 칸트와 니체가 말하고자 한 것이다. 좀 어렵게 말해서 탈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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