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순수한 사유이자 행복, 완전한 자기충족 상태로 실현되지 않은 목적이 하나도 없이 영원히 실존한다. 반대로 감각할 수 있는 세계는 불완전한데, 불완전한 종류의 생명과 욕망, 사유를 가져서 완전한 것을 열망한다. 모든 생물은 정도가 크든 작든 신을 의식하기에, 신을 찬미하고 사랑함으로써 움직이고 행동한다. 따라서 신은 모든 활동의 목적인이다.
러셀의 서양철학사 중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부분 중. p.239~240
어쩌다 유럽의 2000년사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일까. 모든 것을 보이지 않는 무언에 끼워 맞추려고, 안 되는 것을 기어코 되게 하려 했던 두 사람으로 인해 지금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병들고 고통스럽게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나 그 둘의 철학은 하등 다를 게 없다. 거기서 거기이다.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곧 감각할 수 없는 사유의 세계, 완전한 이성의 세계다. 그들은 감각할 수 없는 완전한 세계를 갈망했으며 그것이 이상의 세계고, 실체라고 생각했다. 아울러 이성적으로 사유하는 변하지 않는 존재를 떠올렸으며 그랬기 때문에 철저하게 현재의 삶을 부정했다. 감각적 세계를 저등 하게 본 것이다. 얼마나 황당한 주장인가. 오직 더 높은 등급의 세계만을 탐구하도록 부추긴 것인데, 결국에 가선 눈앞에 보이는 나무 하나도 실체가 아니라는 식으로까지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그들이 정상적인 인간이었는지도 궁금할 정도다.
그것이 형이상학이란 그럴듯한 단어로 소개되고 있어 자칫 속을 수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비슷한 말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성경을 자세히 읽지 않는 기독교인들에게서 그런 비정상적 행태들이 가끔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을 저주하고 저~ 천국을 동경하는 정도가 상당히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일 수 있다는 말이다. 사이비 신도들이 재산까지 바쳐가며 돼지 멱따는 목소리로 부르짖는 행태를 떠올려보자. 그런데 플라톤의 글을 읽고 있으면, 만약 플라톤이 살아 돌아온다면 그런 짓들을 칭찬하고도 남았을 것이란 생각마저 든다. 현실을 저속하게 보고, 이데아의 세계만을 고등하게 본 플라톤인데 안 그러고 남을 수가 있을까.
혹자들은 플라톤의 손이 하늘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손이 땅을 향한 만큼 그들의 사상과 철학이 다르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또한 틀린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와 형상을 통해 세상을 설명하고 있고, 부동의 원동자 unmoved mover 를 통해 신의 섭리를 이해하려 한 사람이다. 특히나 모든 것들의 목적성을 이야기하며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는 진보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벗어남을 요청하고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로의 여행을 보다 그럴듯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다. 그것을 현실 속에서 단계적으로 구현해 낼 수 있는 것을 말하다 보니 손이 땅을 향하는 그림이 나온 것이다.
그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행복이란 게 가능할까.
속지 말자.
현재의 나를 부정하면 행복은 존재할 수 없다. 현재의 나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만족하고 감사하지 못하면 '행복'이란 저주가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만을 소망하면서, 현실을 만족하지 못하면서, 심지어 껄핏하면 자신을 부정하면서 어떻게 행복을 말할 수 있겠는가.
성경은 플라톤의 철학과 다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는 말은 바울 사도가 한 말이다. 그는 분명 하늘의 시민권을 말했으나, 현실에서의 기쁨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 기쁨이 비록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에서 구현된 기쁨일지라도 현실의 나라는 존재 안에서 이뤄질 기쁨을 말한 것이지 나를 배제하고, 옆사람과 상관없는 기쁨이 아닌 것이다. 바울 사도는 또한 자족하는 삶을 말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만족할 줄 알라는 것이다. 가족을 돌아볼 것을 말하며, 그렇지 못한 자를 믿지 않는 자보다 못하다고 했다. 바울은 현실을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성도 간의 사랑을 말했으며, 그들을 걱정하고 그들을 위해 밤낮 쉼 없이 일한 것을 말한 사람이 바울이다. 세상을 향해 관조와 관망의 철학을 꿈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 바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은 뜬금없는 것이다.
우리가 가져야 할 행복론은 눈에 보이는 것이다. 내 주위에 있는 모든 것에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나의 소중함을 아는 지식과 지혜에서 행복도 생겨난다. 건강한 삶이 또한 행복한 삶인 것이다. 그렇게 현재의 삶을 만족하는 것에서부터 행복은 시작한다. 신의 섭리는 분명 감각할 수 있는 세계에서 발견된다. 본질이란 내 피부의 감각에서 발생하는 것이지 그것을 부정하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행복의 순간은 '멀리 뵈던 하늘나라'에 있지 않다. 우리 안에 이뤄진 하나님 나라에 있다.
이를 생각한다면 지금 이 순간이, 내 옆에 있는 모든 것이, 나 자신의 현 상태까지 모두 축복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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