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픈 자에게 가장 큰 기쁨은 먹는 일 이상의 것은 없을 것이다.
먹는 것과 기쁨을 연결시키는 것은 배곯은 사람만이 안다. 배고픈 자에게 평화롭고 행복한 사회는 나누어 먹는다는 것, 잔치이며, 그 이상은 없을 것이다. 예수가 말하는 하느님의 나라가 먹는 일, 나누어 먹는 일을 빼고 생각된 것이라면 그것은 거짓이다. 민중의 현실과 유리된 하느님의 나라가 왔으면 무엇하며, 온다고 저들과 무슨 상관이 있을 것인가.
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 141 p.
안병무를 아는가. 수많은 기독교인들이여. 안병무를 아는가.
나는 기독교인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 같다. 나고 자라기를 교회에서 했고, 주말이면 몸과 마음이 교회에 있었다. 지독하게 성경을 읽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구약을 완독 열 번했다. 자랑삼아 말할 때 '신약 완독은 세다가 포기했다'고 했다. 머리가 잘 돌아가던 시절이다. 친구에게 '아예 성경을 통째로 외워버릴까?'라고 말했던 것도 기억난다. 성경을 사랑했고 존경했다.
그런 나였다.
그런데 안병무 선생을 서른 후반에 와서야 알다니. 그와 관련한 경향신문의 한 기사 단락에 그의 목소리가 글로 담겨있다.
눈앞에 있는 형제의 수난을 외면하고 천국으로 향하는 직통로는 없다. 남이야 어떻든 내 영혼의 구원만을 위해 벌버둥치는 자들이 만일 종교인이라면 그건 종교적 이기주의자다. 이런 이기적인 자들이 수용되는 곳이 천국이라면 나는 거기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겠다. 그런 곳에 예수가 있지 않을터이니까.
이 글을 읽으며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여기 있네' 싶어 반가웠다.
내가 지독한 기독교인이었던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기적 신앙인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을 보지 않고 하나님만 쫓는,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성스러움이란 더러운 통에 빠져 죽어도 그게 좋다고 말할 신앙인. 바리새인도, 사두개인도 혀를 내두를 만큼 지독한 복음주의자, 성경주의자, 조직에 충성한 자였다. 그런 것을 나는 20살, 특히 밴쿠버에서의 21살에 직시할 수 있었다. 그 후 'ㄱㅇㅍ의 때 좀 밀어라'라고 말한 분의 말을 따라 나를 바꾸어 나갔다. '인간은 안 바뀐다'고 누가 그랬던가. 그러든 말든 나는 바꾸었다.
하지만 내 친구들은, 솔직히 말하지. 그런 경험이 없었다.
갈수록 갈수록 위의 상을 위해, 면류관 타러, 왕권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게 잘못됐냐고. 잘못된 이유를 100가지도 더 말할 수 있다. 더러워서 말을 하기 싫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나의 상을 언급한다? 그 순간 상은 결코 너에게 오지 않을 것이다. 성경은 구약이든 신약이든 교만에 대해 경고한다. 계명성의 사례는 너희들도 잘 알 것이다. 그 죄가 무엇이겠냐. 높아진 마음 아니냐? 쉽게 지나칠 게 아니다. 자신을 구속하신 예수에 대한 감사만으로도 충분한데 상? 그것은 주는 분의 것이다. 없어도 된다는 말이 먼저 나와야 한다. 왜냐? 나를 구속해주심 때문에. 값 없이 구속해주셨기 때문에. 송구해서라도 면류관을 말 못한다. 성경에서 믿음을 지킨 자에게 성도들과 함께 주실 면류관에 대한 말씀만으로도 그저 감사하는 마음이면 끝이다.
친구들이 이걸 모르는 이유를 난 안다. 솔직하게 말하지. 성경을 안 읽으니까. 조직의 목소리를 성경보다 우대하니까. 그렇지 않다고? 그렇다면 성경을 왜 설교보다 가까이 안 하는데? 양심에다가 아니라고 항변해봐라. 니들 양심이 비웃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니들 부모가 결국 그런 충성스런 조직마저 배신하고 떠난 것이다. 나중에 울면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라고 말하고, ㅇㅎㄱ를 저주하던 것은 없던 일로 스스로 치부하겠지만. 양심이 비웃을 것이다. ㄷㅍㄷ 사건으로 모임이 다시 혼란스러워질 때 눈물을 흘리며 걱정하던 그 대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심정은 그들에겐 무시해도 마땅한 것이었다.
그들은 사람을 함부로 무시하는 경향만 짙어 갔다. 자기와 함께 하지 않는 자들은 일단 무시하고 봤다. 그런 표현을 대놓고 했다. 놀라운 일이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을까.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가고,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은 중세의 병신들을 나는 ㄱㅅㅇ을 우주의 중심으로 여기는 거룩한 친구들을 보며 이해했다. 모임에 도움을 줬다? 경량화한다면 그것마저도 내가 앞설 걸? 웃기지? 너희들이 사람의 눈에 띈 곳에서 한 행동들과 '작업들'을 다 더해도, 뒤에서 조용한 곳에서 한 나의 일들이 그렇단 말이다. 무식하게 들리지? 너희들처럼 말해보니까.
하...
더 말해 무엇하랴.
안병무의 책을 읽으면 이런 친구들이 생각나 화가 난다. 그래서 써봤다. 교만하게 말이다.. 원래 이렇게 글을 쓰려한 것이 아닌데..
나는 다시 한번 예수 그리스도의 다녀가심을 생각할수록 놀라운 점을 발견한다. 오클로스, 이 책에 나온 민중은 무엇을 말하는가. 무리가 무엇인가. 가난한 자들이 누구인가. 예수는 왜 그들과 함께 먹고 마셨는가.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길이 닿기를, 그 간곡한 심정을 가진 여인의 혈루증은 기적처럼 나았지만 예수는 이를 보고 믿음을 말했다. 예수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너의 믿음을 말했다. 그것이 병을 낫게 했다. 이런 단순한 진리를 우리는 쉽게 보지 못하고 넘어간다.
안병무 선생의 한 땀 한 땀 수놓듯 정성을 다해 쓴 '갈릴래아의 예수'는 나에게 감격을 준다. 이렇게도 복음서를 읽을 수 있구나. 이렇게도 예수를 볼 수 있구나. 나의 믿음과, 우리의 신앙이 예수가 원하는 방향으로 자랄 수 있다는 지혜와 희망을 나는 발견한다. '서로 사랑하라'라는 말씀을 생각한다. 예수를 떠올린다. 그 말씀의 행적은 복음서에 드러나 있다.
그것을 안병무 선생은 '민중운동'으로 설명하지만, 거창할 것 없다. 배고프고, 헐벗고, 무시당하고, 외면당하는... 조직의 논리에서 벗어났다고 쉽게 저주받는 그들. 예수는 그런 이들과 함께 했다. 그들의 편이었다. 그곳이 갈릴리였다. 그 아름다운 바다. 그 평온한 호수와 들판. 다시 가보고 싶다. 예수는 부활 후 갈릴리에서 제자들과 만난다고 했다.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였다. 민중과 함께한 그곳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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