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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으면서

예수의 마지막 7일 - 대제사장의 두려움

by 하 루 살 이 2021.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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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마지막 7일 - 대제사장의 두려움

 

1. 무화과나무의 마름에 대한 베드로의 질문
2.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장로들의 질문 -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3. 예수의 비유 - 포도원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간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
4. 바리새인의 반박 - 가이사에게 세를 바침에 대한 질문
5. 사두개인의 반박 - 부활에 대한 질문
6. 서기관 중 한 명의 계명에 대한 질문, 그리고 예수의 두 계명에 대한 선언
7. 예수의 반박 -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냐
8. 예수의 서기관에 대한 경고  
9. 과부의 두 렙돈에 대한 설명
10. 성전을 나가실 때, 종말에 대한 선언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셋째 날. 곧 화요일이 왔다.

셋째 날에 하신 일은 매우 명확하게 기록돼 있고 어느 곳보다 내용이 길고 풍부하다. 

 

무화과나무의 저주는 월요일 아침에 있었던 일이다. 그리고 마가복음에 따르면 화요일 아침 예수와 제자들이 다시 무화과나무를 지날 때 베드로가 그 나무의 마른 것을 확인하고 예수께 그 사실을 말했다. 그리고 예수의 답변은 예상치 못한 '믿음'이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반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막 11:24-25

 

 

무화과나무 저주를 통해 우리에게 새로이 요구되는 것은 믿음이며 기도이고 용서이다. 이 용서는 타인에 대한 용서, 곧 그 안에 담겨 있는 사랑의 요구다. 무화과나무로 비유되는 유대인, 곧 율법은 마침이 되고, 이후 선언된 바는 믿음이라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행위로써 의로워짐이 구약과 율법의 중심이었다면 이 중심이 이제는 믿음으로 바뀌고 대체됐다. 그리고 사제들에게 맡겨진 하나님과의 소통은 개인에게 직접 주어졌다. 곧 기도로써다. 그리고 나의 행할 것은 타인에 대한 용서다. 

 

 

그리고 예수께서 예루살렘 입성을 하신다. 먼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장로들이 질문한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걸어다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 할 이 권세를 주었느뇨

 

막 11:17-18

 

 

예수께서 그 성전을 걸어 다니셨다는 말씀은 매우 중요하다. 예수님은 더 이상 채찍을 들지 않았다. 수요일의 성전은 화요일의 성전처럼 혼잡스럽지 않았다. 특히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기이하고 두려운 존재였다. 성전 정화 사건으로 소동이 일어날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를 멸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지만 아무런 행동을 하지 못했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무리가 예수님의 교훈을 기이히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막 11:18). 그만큼 그의 걸어 다니심 또한 누군가에게는 두려움이요 기이했던 것이다.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장로들이 물은 것도 두려움의 발로였다.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그들도 알고 싶었던 것이다. 대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인지. 누가 이런 일 할 권세를 주었는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백성들은 이미 예수의 말씀에 기쁨을 느끼고 있었지만 이들은 달랐다. 예수의 말씀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가 두려웠던 것이다. 이들의 마음은 사도행전에서 바리새인 가말리엘이 말한 그 마음이었을 것이다. 혹여나 이 사람의 권세가 하나님께로서 난 것은 아닐까. 이는 양심 깊은 곳에 퍼진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답변을 주지 않으셨다. 오히려 되물었다. 요한의 세례에 대해.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내게 대답하라

 

 

이 물음에 그들은 서로 혼란스러워했다. 하늘로서라고 한다면 요한을 믿지 않음을 질책할 것이고, 반대로 말한다면 요한을 참선지자로 여긴 백생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결국 '알지 못한다'라는 대답이 나왔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이후 나온 포도원의 비유는 그들의 양심을 건드린다. 포도원을 세로 받은 악한 소작인들은 소출을 받으려 나타난 주인의 종을 잡아 심이 때리고 거저 보내었으며,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했고, 죽였다. 마지막에는 그의 사랑하는 아들, 상속자를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다. 예수님은 포도원 주인이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비유에 대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장로들은 양심에 질렸다. 자기들을 가리킨 것을 알았다.

 

권세에 대한 변론과 포도원의 비유는 서로 연결된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의 저주와 마찬가지로 율법의 완성과 마침, 천국과 하나님 나라, 믿음에 대해 계속 말씀하셨다. 하지만 과거에 예속된 이들은 이런 혁명적 선포가 두려웠다. 권력잡은 이들은 근본적으로 변화를 거부한다. 이권의 파괴됨에 저항한다. 성전을 중심으로 권력을 유지했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권력의 유지에 있었다. 그렇게 그들의 눈은 가리어졌다. 하지만 양심은 울리고 있었다. 그 울림은 그들을 혼란스럽게 했고, 부자연스럽게 만들었다. 두려움의 작동이었다. 이 모든 것을 백성들은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각인의 마음에 다르게 작용했다. 누군가에겐 두려움이요 누군가에겐 기이한 일이다.

나는 누구의 입장인가.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This was the LORD's doing, And it is mavelous in our e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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