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으로 말하다 26] 예수의 마지막 7일 -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1. 무화과나무의 마름에 대한 베드로의 질문 |
2.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장로들의 질문 -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
3. 예수의 비유 - 포도원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간 사람 |
4. 바리새인의 반박 - 가이사에게 세를 바침에 대한 질문 |
5. 사두개인의 반박 - 부활에 대한 질문 |
6. 서기관 중 한 명의 계명에 대한 질문, 그리고 예수의 두 계명에 대한 선언 |
7. 예수의 반박 -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냐 |
8. 예수의 서기관에 대한 경고 |
9. 과부의 두 렙돈에 대한 설명 |
10. 종말에 대한 선언 |
위 도표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셋째 날, 화요일에 하신 일에 대한 표이다. 기준은 마가복음이다.
지난 글은 예수님의 권세에 대한 대답과 포도원에 대한 비유였다. 이번에는 바리새인, 사두개인과의 논쟁이다. 그리고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최종 정리가 나온다. 먼저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보냄을 받은 자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에 대해 묻는다.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정확히 말하면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칠지를 묻는다는 것 자체가 불법적 요소를 함유하고 있다. 실로 반역적 처사이다. 그런데 저런 질문이 나왔다. 곧 그들은 목숨을 건 것이다. 예수를 죽이는 것에 그들도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예수 사건은 유대 전 지역에 요한의 때보다 훨씬 더 강한 영향을 주고 있었다. 민중이 그를 따르기 시작했고 왕으로 세우고자 했으며, 예루살렘 입성 땐 호산나를 외쳤다. 바리새인은 자신들의 입지와 권력이 약화될 것에 대한 우려로 혼란스러워했을 것이다. 그래서 바리새인은 방법을 찾기를 예수를 로마의 반역분자로 만들자. 세금 거부야 말로 로마의 역린을 건드리는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그만큼 세금 문제를 꺼내는 것은 바리새인과 헤롯당에게 또한 차후 책잡힐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지배 세력에게 오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목숨을 바쳐 예수 죽이기에 나섰던 것이다.
이 시대의 로마 황제는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Tiberius Julius Caesar Augustus(기원전 42년 11월 16일 ~ 37년 3월 16일)로, 그는 로마의 제2 황제다. 그를 두고 데나리온에는 한 라틴어 문장이 쓰여있기를 '신의 아들'이라고 나온다. 그러하니 유대인 입장에서는 가이사에게 세를 바친다는 것 자체가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는 격이었다. 그러하니 예수가 그에게 세를 바치라 말할 수도 없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예수님은 데나리온을 가져오라고 했다. 이 화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고 물었다. 그리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다. 성경을 읽는 이들은 이 대답이 재치 있고 지혜롭다 여길 수 있겠지만 일각에선 반대로 본다. 예수께서 가이사 곧 로마의 지배권을 인정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일단 대의를 위해 위험한 발언은 피하자는 심상이 있었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하지만 그런 해석은 옳지 않다. 예수님은 지상에서의 권력 창출을 목적으로 움직이시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것을 피했다.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When Jesus perceived that they were about to come and take Hime by force to make Him king, He departed again to the mountain by Himself alone.
요 6:15
하나님 나라도 지상이 아니라 마음에서의 이루어짐으로 설명했고, 므나의 비유도 말씀을 듣는 이들이 하나님 나라가 '당장에 immediately' 나타날 줄로 알았기에 해주신 말씀이다. 곧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당시엔 지상에서의 이루어짐과는 무관했다. 곧 예수님은 로마의 지배권을 인정할 이유도 없고, 그 지배권을 빼앗을 목적도 없었으며, 대의를 위해 발언을 삼갈 입장도 아니었다. 마음의 변화, 곧 회개를 통해 이루어질 마음속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움직이고 말씀하셨을 뿐이다. 그러하기에 누구에게 세를 바치고 마는 것은 예수님의 관심사도 문젯거리도 아니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대답을 기이히 여겨 잠잠하자(눅 20:26) 뒤이어 사두개인들이 나타났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물과 기름 같이 어울릴 수가 없는 존재들이다.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고 한다(행 23:8). 사두개인은 당대 귀족 계급으로서 정치적 색채가 강했고, 오직 모세의 오五경만을 성경으로 규정했다. 문명에 개방적이고 현세적이었기 때문에 친로마적이었으며 따라서 세를 바치느냐 마느냐라는 위험한 질문은 본능적으로 할 수 없는 이들이었다.
그들이 예수에게 와서 부활을 질문한 목적은 분명했다. 첫째, 예수를 바리새인의 일부라 생각해 그를 인정할 수 없다는 점이 질문 밑바닥에 깔렸다. 둘째, 부활의 불가능함을 예수의 입을 통해 밝히겠다는 목적이 있었다. 모세의 말대로 형이 자식이 없이 죽었을 경우 동생이 형수를 취해 후사를 세워야 하는데, 일곱 형제가 그런 식으로 한 여자를 취할 경우 부활에 가서 누구의 아내가 되겠냐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해 오해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매우 중요하다. 부활에 대해 처음으로 구체적인 설명을 해주셨기 때문이다. 먼저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죽음이 아니라 생명에 대해 말씀하셨다.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찐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막 12:26-27
사두개인은 죽음으로 끝이라고 여긴 자들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죽음 이후의 영생을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살아계심을 설명했다. 조상들을 가리켜 말씀하신 하나님은 그 자체로써 생명이시기에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닌 것이다. 오직 산 자들, 곧 죽었어도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그들을 가리켜 말씀하셨다. 죽음의 종교를 가진 사두개인에게 생명의 하나님에 대한 대답은 그들을 할 말 없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러자 한 서기관이 나타났다. 그리고 첫째 되는 율법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1.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2.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
예수님은 이에서 더 큰 계명은 없다고 하셨다. 뭔가 잡히는 게 있지 않은가. 바리새인들의 외식하는 마음, 사두개인들의 생명을 부정하는 마음에 이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지는 변론의 주제들이.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으로 보여주신 사랑이 곧 율법의 완성이었던 것이다! 내 몸과 같이라는 말씀이 얼마나 어렵고 본능적이며 무조건적인가. 우리는 내 몸을 위해 얼마나 부단히 움직이는가. 아무 요구도 없이, 바랄 것 없이 본능적으로 자신을 아끼고 위한다. 이웃을 그렇게 사랑하라는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그것은 신에 대한 사랑의 완성이다. 그리고 그 완성을 몸소 예수님이 이루신다.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There is no other commandment greater than these.
이 두 계명들 보다 더 큰 것은 없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으로 가능하다. 서기관이 이에 동조하자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셨다. 바리새인처럼 시기와 미움도 아니요, 사두개인처럼 배타와 비난도 아니요, 오직 사랑. 이 사랑이 하나님 나라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Now when Jesus saw that he answered wisely, He said to him,
"You are not far from the kingdom of God."
But after that no one dared question H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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