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은 행동을 구속한다. 개인은 조직 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조직에서 벗어나야만 주체자로서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과거 농노 사회도, 노예 사회도 어느 누구도 자유를 느낄 수 없었다. 애초부터 우리 인간은 자유로울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집단 안에선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는 노예일 수 있다.
나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위로하는 정신'과 문유석 판사의 '개인주의자 선언'을 같이 접했다. 다른듯 같은, 그러면서 다른 책이었다. 이 둘은 집단을 고민했다. 조직이 개인에게 끼치는 영향을 분석했다. 나는 이 두 책을 통해 한 개인이 조직을 위해 희생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당치도 않는 일인지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가당치도 않은 일이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 흔하게 이뤄질 뿐 아니라 요구된다는 것도 알게 됐다.
노예제도는 사라지지 않고 더 견고히 우리 사회를 형성하고 있을 지 모를 일이다.
자유란 무엇일까.
슈테판 츠바이크는 '위로하는 정신'의 부제로 '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몽테뉴'로 정했다.
몽테뉴는 철학자다. 하지만 그는 조직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선 결코 환영받지 못할 철학자다. 몽테뉴는 철저한 개인주의자였다. 자신에 대해서만 고민했다. 물론 그는 관직에서도 일했다. 왕의 친구였다. 하지만 그런 직에 그는 관심이 없었다. 개인의 자유가 무엇이냐를 평생을 바쳐 연구했다.
가족 종교 조직
몽테뉴에게 그것은 신화였다. 그저 인간이 믿기 쉽게 꾸며진 동화였다. 저자 슈테판 츠바이크는 2차대전이 혼란을 겪은 저자다. 전쟁의 혼란을 피해 영국, 미국, 브라질 등지를 떠돌았다. 그 와중에 이 책을 썼다. 그는 전체주의를 강조하는 유렵을 떠나 브라질에 안착한 후 몽테뉴를 발견했다. 자유자를 찾은 것이다.
가능하면 다시 내면의 평화로 돌아갈 길. 개인적 자유를 구할 길.
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몽테뉴를 이렇게 설명했다.
가족과 조국을 위해 희생하고, 조직과 집단을 위해 삶을 바치는 것. 그 안의 개인은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 개인들이 모인 집단에선 미움과 배척의 메시지가 흔하다.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누군가는 욕먹는 대상, 배척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흔히 있는 일이다. 조직은 좀 더 강화된다. 어느 조직이건 자유로운 영혼은 용납될 수 없다.
위로하는 정신이나 개인주의자 선언 두 책 모두 한 사회가 개인의 자유를 인정하면 할수록 다양성은 보장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개인이 시선으로 이상하게 보지 않고 당연하다는 시각이 사회의 자유를 늘린다고 봤다. 조직보다 개인을 존중하는 사회의 시선 그것이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조직에 너무나 얽매여 산다. 더욱이 '내' 기준을 '조직'에 맞춘다. 그에 벗어난 사람을 사람을 미워하길 좋아한다. 타인에 대한 배려는 그렇게 사라진다. 모두가 노예이기에 자유자를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보다 더 무서운 사회는 바로 조직사회인 것이다. 그곳에선 오직 타인의 저주만이 자유로울 뿐이다.
몽테뉴의 싸움은 그래서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벌였다. 나는 유일무이한 존재인 것이다. 한번 가면 되돌릴 수 없다. 결국 남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남의 시선보다 내가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더 중요한 것이 된다.
몽테뉴는 '나'를 더 두려워했다.
몽테뉴는 왕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내 영혼의 바탕까지 들여다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누군가에게 가까이 다가가거나 어떤 사람을 해칠 능력이 없다는 것, 복수나 질투를 하지 못하며 공공연한 분노를 야기할 줄 모른다는 것, 소문을 퍼뜨리거나 불안을 야기하지 못한다는 것, 내가 한 말을 어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나를 심판할 나 자신의 재판소와 나의 법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을 몽테뉴가 전한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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