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선은 오로지 신이 현존한다는 조건 아래서만 생기므로, 그것은 신이 현존한다는 그 전제를 의무와 불가분리적으로 결합한다. 다시 말해 신의 현존을 상정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필연적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p.281
칸트의 책은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문장 자체가 일상에서 쓰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칸트의 책 첫 장에서 그만 포기하게 된다고 한다. 실천이성비판 첫 문장을 한 번 볼까.
제1권
술수 실천 이성의 분석학
제1장
순수 실천 이성의 원칙들에 대하여
1
설명
실천 원칙들은 의지의 보편적인 규정을 함유하는 명제들로서, 그 아래에 다수의 실천 규칙들을 갖는다. 이 원칙들은, 그 조건이 주관에 의해 단지 주관의 의지에 대해서만 타당한 것으로 간주될 때는, 주관적이다. 즉 준칙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 조건이 객관적인 것으로, 다시 말해 모든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에 타당한 것으로 인식되면, 객관적이다. 즉 실천 법칙들이다.
위의 글이 실천이성비판 첫 문장이다.
'너무 흥미롭다'라고 느꼈는가? '무슨 소리냐'라는 기분이 들었는가. 대다수 두 번째에 속할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 책을 약 두어달 동안 읽으면서 저 말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 알 수 있었다. 칸트는 저렇게 시작해 자유와 불멸성, 그리고 신에게까지 도달한다. 그 치밀한 작전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 대해 여러가지 말로 설명해 놨지만, 나는 칸트가 결국 하고자 했던 말은 '신의 현존'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책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많이 들었다. 보편타당한 도덕법칙에 이 책의 방점이 있는 게 아니라 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다 말하지 못한 진짜 의도, 곧 '신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를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칸트는 강조하고 있다.
나도 다른 글에서 무척이나 비판했던 '광신적'에 대해 칸트도 적나라하게 거부하고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칸트는 인간이 가져야 할 신앙이 정상적으로 기능하기 위해 변치 않은 완벽한 법칙을 제시하고 인간이라면 부정할 수 없는 논리를 펼쳐내고 있다.
특히 이 책의 중간중간마다 쉽게 발견되는 성경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을 보며, 나는 칸트가 눈치 못 채도록 자신 또한 성경을 열렬히 읽는 사람임을 드러내고 있다고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지혜란 이론적으로 보면 최고선에 대한 인식이요, 실천적으로는 의지의 최고선과의 알맞음을 의미한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 p.288
보라. 이 말을 성경을 가까이하는 기독교인들이면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라는 것을 단 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잠언 9장10절
이 외에도 복음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말들도 칸트의 이 책에 나온다. 성경을 연상케 하는 구절들은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 한 두 군데서 발견되는 게 아니다. 칸트는 철저히 이성적인 인간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곧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뤄지 않는 인식을 거부하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그런 그였지만, 마음속 한 편에 남아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신에 대한 존경이었다. 완벽한 도덕법칙과 이것을 가능케 자유의 세계, 최고선에까지의 도달함이 그에게 있었던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남들에게 차마 말하지 못하는 신의 존재와 로마서에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죄사함'이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언제나 말하고 싶은데, 상식적인 수준에서 보면 그것을 받아들일 만한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싶어 침을 삼키며 아쉬워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칸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토록 어려운 책을 썼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신의 존재를 이제는 어느 누구도 반박하지 못하도록, 실천이성비판이란 위대한 책을 썼다. 그리고 인간이 그 신을 어떻게 찾을 것이냐에 대해서는 이 책에선 최대한 말을 아낀 것 같다. 그저 존경할 뿐이었다. 그리고 신의 존재를 확증했다는 점에서 그는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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