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같이 추운 주말이면
나는 우이동의 북한산 한 자락에서 따스한 커피 한 잔을 시켜먹는 재미에 푹 빠진다.
거기서 읽는 책 읽는 시간이란,
어지러운 세상으로부터 잠시 해방되어, 남들로부터 해방되어, 조직의 힘과 일방적으로 요구되는 모든 사상과 신념, 종교의 목소리로부터 해방되어!
오직 '나'라는 존재에게 다가온 시간에 집중하는 기회와 매우 맞닿아 있다. 그것을 일컬어 일종의 자유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타인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기에 말이다. 잠시나마이며 비록 미약한 것이겠지만, 그래서 더욱 귀하다.
숨 쉬고 있는 기적을 생각해본 적 있는가.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신체의 조건들을 곰곰이 생각해본 적 있는가. 음식이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삼켜지고 소화되는 행위에 놀라워한 적 있는가. 오직 남들과만 어울려 나 자신에 집중할 기회를 상실한 채 살고 있지 않은가. 나를 잊고 살지는 않은가. 작은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나는 생각한다. 나는 살아 있음에 감사하다.
역시 두서 없고 근본 없이, 떠오르는 대로 쓰는 글이 나에겐 재미있다. 그러다 도올 김용옥 선생께서 쓰신 '도올주역강해'에 대장동 사건과 화천대유에 대한 글이 있어 간단히 정리할까 한다. 도올 김용옥 선생께선 대장동 사건과 화천대유에 대해 이렇게 쓰셨다.
부동산업자들이 구석구석 땅을 들춰내어 개발이라는 수작 하에 굽굽이 이윤을 발러먹는 행위를 "화천대유"라 불렀으니, 우리나라의 '역'에 대한 오해가 이런 터무니없는 짓들로부터 유래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의 '대유'는 크게 해쳐먹는다는 뜻이니 '역'의 본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도올주역강해 p.263
'화천대유'는 책을 통해 보면 무슨 말인지 잘 설명이 되어 있어 굳이 길게 쓸 이유는 없겠지만, 하나 말하고 간다면 도올 선생은 대유를 나오는 '성대풍유'에서의 풍유는 '풍요롭게 있다'는 의미일 뿐 결코 '크게 소유한다'는 뜻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대유大有는 거대한 소유가 아니다. 풍요롭게 한다는 뜻이 그 속에 숨어 있다. 소유가 아닌 '나눠 갖는 개인적 비움'이 화천대유의 본 뜻이었던 것이다.
도올 김용옥 선생은 이렇게도 말씀하신다. "대유괘의 효사에는 '소유의 확대'를 나타내는 그런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이 책에는 '천화 동인'이라는 단어도 나온다. 동인同人이란 같이하는 사람들끼리 협동한다는 뜻이다. 대장동 사건에서 천화동인이나 화천대유라는 단어가 기사를 통해 우리에게 자주 전달되어 너무나 익숙하게 들릴 뿐 아니라 부정적인 이미지로 다가오지만 실제 담긴 의미는 달랐던 것이다. 도올 선생께서도 이 단어에 대해 "제20대 대선 때 문제가 된 부동사업체의 명칭이 이 괘명에서 왔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대장동 사건으로 인해 우리는 이렇게 단어의 오염을 경험하고 있지만, 실제 주역에서 말하는 화천대유, 천화동인은 결코 머리 잘 돌아가는 인간들의 욕심에 의해 쓰일 단어가 아니었다. 풍요 속에 나눔이 있고, 그것을 통해 우리는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쓰여야 하는 단어였지만, 이런 식으로 일부 인간들의 단어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사용이 불러온 결말은 이 사회의 어지러움과 정치적 갈라섬이었다. 그 피해는 언제나 그랬듯 국민의 것이었다.
노자 제15장의 왕필주에 유명한 말이 있다.
"차면 넘치게 되어 있다."
넘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 그래서 차기 전에 자기를 비워야 한다. 허虛를 유지해야 생생生生의 순환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중략) 풍요로운 사회일수록 더 많이 소유하려 하지 않고 이렇게 자기를 비울 줄 아는 인품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도올주역강해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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