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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억원으로 투자하기

성경에서 보게 된 자본의 능력

by 하 루 살 이 2023.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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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For whoever has, to him more will be given; but whoever does not have, even what he has will be taken away from him.

 

 

위의 말씀은 마가복음 4장 25절에 나온다. 나는 이런 비슷한 말씀들이 성경 곳곳에 있다는 것을 최근 2~3년 사이에 발견했고 이를 바탕으로 자산을 불려 나가는 묘한 방법을 터득하게 됐다. 

 

 

 

 

어렸을 적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를 읽은 적이 있다.

저자 로버트 기요사키가 설명하는 '돈이 돈을 만드는 방법'이 머리로는 이해가 됐지만 예시를 찾을 수 없어 답답했던 기억이 난다. 복리의 마법은 이 책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강조한다. 하지만 나는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할지 막막했던 것이다. 그렇게 30대 중반까지 왔다. 

 

그런데 어느날 나는 자본이 자본을 만들어내는 구조를 알게 되고 심장이 뛰는 기분을 느꼈다. 나는 바로 실천에 옮겼다. 이제는 40대 중반 전에 더 이상 일을 하지 않고도 자산이 증가하는 상황에 들어갈 수 있음을 알았다. 

 

 

 

위의 표는 연 '7%' 중반 이상의 증가율을 전제로 한다.

아울러 일정 부분 노동수익과 금융소득이 동시에 발생하는 현실 조건을 최소화했다. 수학적 머리가 있는 사람은 엑셀 안에 있는 수식을 이해할 것이다. 그런 이해 없이 보기만 해도 자산 증식 속도가 빨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나는 2022년부터 1억원 이상으로 시작했다. 2023년엔 저 속도보다 더 빠르게 자본이 늘어날 현실을 알고 있다. 그래도 조건은 최소화했다. 그리고 2025년에서 2026년에는 더 이상 일하지 않아도 괜찮은 자본의 확장 국면으로 들어간다. 

 

저 방법은 '가진 자는 더 가진다'는 성경 속 비법에서 나왔다. 

누가복음 므나의 비유에는, 한 므나를 그대로 내놓은 종을 질책하는 주인의 말이 나온다.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변리까지 찾았으리라.

Why then did you not put my money in the bank, that at my coming I might have collected it with interest?

 

 

 

보이는가. 은행이 보이는가. 이자에 대한 개념이 보이는가. 

여기에 모든 게 다 들어있다. 이 글을 쓰는 나는 심장이 뛰는 걸 느낀다. 

 

나는 '가난은 죄악'이라고 본다. 더 정확히는 '죄악의 가능성을 모두 담고 있는 조건'이 가난이다. 돈으로부터 궁지에 몰리면 이도 저도 없다. 거기에 신앙이 있는 줄 아는가. 그럼 당신은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해도 좋다. 그리고 굶고 있는 자식들을, 고통받는 아내를 보고도 혼자서 신앙의 경지에 올랐으니, 더 이상 너를 인간이라 칭하기 어렵다. 천국이나 빨리 가라.

 

가난을 받아들이고 신을 찬양해봐라. 신이 참도 좋아할 것이다. 그런 찬양을 받아들이는 신이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신이 아니다. 있어도 당장 없어져야 할 존재다. 찬양받을 가치도 없다. 그것은 결코 성경적이지도 않다. 바울 사도는 분명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 자를 불신자보다 악한 자라고 칭했다(딤전 5:9).  생각으로만 돌아보는 게 돌아보는 건가? 돌아보는 방법에는 정신적인 것이 중요하겠지만, 우리는 육신을 가진 존재다. 가난은 그 육신의 조건을 붙들고 정신을 고통스럽게 한다. 무엇이 돌아보는 것인가. 

 

 

 

 

성경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3서 1:2)이라고 했다.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 우리는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바울 사도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딤전 6:10)'며 미혹됨을 경고했다. 하지만 명확히 보자. 돈이 아니다. '돈을 사랑함'이라는 마음 상태에 대한 경고다. 아울러 성경에는 바울 사도와 그의 동행자들을 위해 돈을 사용한 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곳곳에 나온다. 

 

이렇게 쓰고 나니 너무 구구절절하다.

그냥 알아서 선택해서 살아라. 

 

나는 내 나이 대에서 나보다 성경을 더 읽은 사람을 쉽게 찾지 못한다. 고등학교 때 이미 구약 완독 10번이 끝났다. 그때 '신약은 세다가 까먹은 현실'을 알았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가난의 현장을 바라봤다. 그 가난이 무언가 잘못됨을 알았다. 그런데도 가난을 칭송하는 자들이 넘쳐나는 조직도 봤다. 돈을 내는 정도에 따라 신앙 척도를 재는 끔찍한 분위기도 봤다. '작정'이라는 더러운 단어를 내놓은 것 자체가 분위기 조장이다. 좀 솔직해 지자. 문제가 생겼을 때 뒷책임은 언제나 한 분이 감당해야 했다. 완벽한 자율에 맡긴 헌금 운동만 해도 좋았을 것을. 일이 추진 안 될까 전전긍긍한 '일 맡은 자들의 무식함'이 만드는 갑갑한 현장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가난한 자는 언제나 돈의 미혹을 받는다. 부자는 그 돈을 쓸 곳을 정할 수 있다.

오직 결단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 결단에 신의 축복이 있다. 나는 후자를 선택하겠다. 나는 은행에 주인의 돈을 넣어두고 변리를 모아가겠다. 그 교제의 장이든, 뭐든 상관 없다. 삶의 모든 기준은 은행 변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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