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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으면서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찌어다

by 하 루 살 이 2022.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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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저희가 소리지르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막 15:12~15

 

 

이들의 외침을 두려움으로 바라본다.

나는 유대인의 소리지름 앞에 입을 다물게 된다. 그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명백한 십자가의 형은 빌라도가 아니라 부르짖는 민중이 외쳤다. 그들은 바라바를 놓게 하였을 뿐 아니라 십자가가 가능하게 했다. 어째서였을까. 아무리 대제사장들의 거짓된 충동이라 해도 이를 이해하기란 힘들다. 하지만 충동된 무리는 이토록 무서웠다. 빌라도는 분명 예수를 놓고자 했다. 그의 부인도 전날 밤의 꿈을 이야기하며 예수에 대해 아무 상관도 하지 말라고 권했다. 빌라도는 두려워했다. 무리의 목소리는 그의 양심을 뒤흔들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서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중략)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저희가 소리 지르되 없이하소서 없이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 주니라. 

요 19장.

 

 

나는 빌라도를 통해 나를 봐야 한다고 했다. 현실의 기준 때문에 잘못된 선택을 해선 안 된다고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나는 유대인들의 외침을 말하고 싶다. 노골적으로 끔찍한 십자가의 형을 말한 그들을.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찌어다. 

And all the people answered and said, "His blood be on us and on our children." 

 

 

아... 이 민중의 목소리 앞에서 손끝의 떨림을 느낀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의 기록이다. 유대인을 향해 쓰여졌다는, 그래서 4복음서 중에서 그토록 구약 말씀이 많이 인용되고 있는 마태복음에서 이 말이 기록으로 남았다. 이 말씀은 이후 얼마나 많은 죄악이 이 땅에 가능하도록 했는지 모른다. 끔찍한 학살, 말할 수 없는 반유대주의는 유럽인들의 마음속에 이 말씀을 통해 양심의 마비를 가능케 했다. '예수를 죽인 자들!'. 이 근본도 없이 무식한 생각에 유대인을 향한 살인과 강도와 처참한 말살은 가능했다.

 

 

 

 

유대인들은 신약을 안 읽는다는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들었다. 그럴만도 하다. 누가 봐도 저 말씀 때문에 반유대주의가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는데, 나라도 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기록이 누가복음도 아니요, 요한복음도 아닌 마태복음에 적혔다는 사실을 떠올려 본다. 유대인을 위한 마태복음 기자가 저 기록을 노골적으로 적어 놨다는 것을 말이다. 

 

역사의 고발은 당사자가 사실을 바탕으로 했을 때 가장 정직하다. 제삼자도 할 수 없는 진실은 당사자가 했을 때 가능하다. 자신이 자신을 고발했을 때 진정성은 보장된다. 다른 복음서에서 십자가를 외친 장면보다 마태복음의 저 한 마디가 유대인을 향한 기록자의 진심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진심은 유대인 아닌 자들에 대한 무서운 경고로 이어진다.

 

요한복음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나는 이 말씀을 십자가형을 외친 민족에 비춰 말하고 싶다. 예수를 그토록 원치 않은 자들이 받은 2000년의 끔찍한 고통이 '자기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영접지 아니한' 바로 그 결과라면, 그 은혜를 넘겨받은 이방인들 가운데 '그 이름을 믿지 않는 자들'을 기다리고 있을 고통은 도대체 얼마나 더하리요. 나는 마태복음에 적힌 유대인의 피의 외침 앞에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이방인에게 넘어온 은혜는 유대인의 그 무거운 율법의 행위에서 벗어나 단순한 믿음으로 가능케 된다. 그렇게 바뀌었다. 그런데 그마저 거부한 결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가. 

 

유대인을 저주할 수 있는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역사를 무섭게 바라봐야 한다. 무참히 죽어간 역사의 피해자들을 우리는 두려움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그 토대가 된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말할 수 없는 피의 역사를 겪어야 했다. 그런데 십자가의 은혜를 믿지 않는 나에게 돌아올 대심판의 역사는 어떠할 것인가. 믿음을 저버린 나는 과연 누구인가. 예수를 거부한 현장의 무리들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십자가의 구속함을 믿지 않는 나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인간이 된다. 대심판은 분명 공의로울 것이다. 결코 흠없이 너의 앞에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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