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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으면서

본디오 빌라도의 재판

by 하 루 살 이 2021.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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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는 내가 어떻게 하랴  막 15:12

And Pilate answered and said again unto them, What will ye then that I shall do unto him whom ye call the King of the Jews?  Mark 15:12

 

 

본디오 빌라도상

 

 

본디오 빌라도의 말들을 보며 우리 생각해보자. 나도 같은 인간인지를. 

 

그는 끝까지 예수를 놓고자 했다. 하지만 이것만 생각하면 빌라도에 대해 오해가 생길 수 있다. 그는 예수를 놓고자 했지만, 법관의 양심을 버리고 손을 씻고 십자가형을 내렸을 뿐 아니라 채찍형까지 내렸다. 인간적으로 보면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인간이 빌라도다.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

막 15:15

 

 

십자가에 달 것이면 갈 것지 왜 채찍질하는 형까지 내린단 말인가. 그 이유는 성경에 분명히 쓰여있다.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빌라도가 결정적으로 마음을 바꿔 먹은 것은 그 자리 유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요한복음에는 유대인들이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라고 소리 질렀다. 그러자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와서 박석(히브리 말로 가바다)이란 곳에서 재판석에 앉았다(요 19: 13). 그의 아내의 말이나 그의 법적 논리도 권력욕 앞에서 무용지물이었다. 그는 자신을 위해 예수를 넘겨준 것이다. 그것도 잔인한 채찍형까지 더해서. 

 

 

 

 

본디오 빌라도는 분명 예수를 심문한 후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 위대하다는 로마법의 상식과 논리로도 살인죄를 말할 수 없었고 오히려 이번에는 유대인의 시기가 작용했다는 것을 모두 다 알았던 빌라도였다. 그런데 그는 양심을 팔아버리는 결정을 내렸다.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않고 손을 씻는 퍼포먼스를 펼친 본디오 빌라도. 우리는 이보다 더 양심을 팔아버린 재판관을 본 적이 있는가. 어느 책에는 빌라도의 고백이라는 내용도 있다. 과연 그런가? 우리는 성경만으로 빌라도를 판단해야 한다.

 

 

진리가 무엇이냐?

What is truth?

 

 

빌라도의 이 한마디를 생각해보자. 유대인들이 소리를 지르며 십자가를 외치는 상황에다, 예수께서는 말을 아끼시고 계신다. 그는 그 와중에 이 한 마디를 묻는다. 진리가 무엇이냐. 

 

 

 

 

그리스의 철학은 진리를 찾는데 모든 힘과 역량을 쏟아낸 사상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이데아를 떠나서 설명할 수 없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존재, 이상향, 곧 진리를 추구했다. 

 

본디오 빌라도가 그것을 배우지 않았을리 없다. 로마는 그냥 로마가 아니다. 헬라화된 로마이다. 그리스의 철학은 로마와 함께 지구 상에 널리 펴졌다. 빌라도는 그들의 철학을 읽으며 이데아가 무엇인가, 진리가 무엇인가, 과연 신이 존재하는가를 고민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 그 급박한 상황에서 어떻게 저런 질문이 나오겠는가. 

 

하지만 그는 다른 선택을 했다. 권력과 지위 앞에 진리를 포기해버렸다. 그는 십자가형을 내렸다.

 

우리는 어떤가. 나는 어떤가. 말씀 앞에, 예수님 앞에, 이 성경 앞에 어떠한가. 예수를 팔아버리고, 세 번이나 저주하고, 거짓 증거를 하며 침을 뱉고 손으로 치며, 권력 앞에 굴복해 예수님을 죽인 이 자들과 다르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예수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우리의 죄사함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행위, 예수님을 거부하는 행위는 이들의 행위와 하등 다를 게 없다. 나는 진리를 묻고도 손을 씻어 포기해버리고 마는 인간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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