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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으면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by 하 루 살 이 2021.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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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으로 말하다 39]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예수의 이 한마디.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이 한 마디 표현을 두고 많은 기독교인들은 헤매었을 것이다. 인류의 속제물로써의 예수가 아니라 죽음 앞에 선 나약한 한 젊은 청년의 목소리로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저 표현을 일반적으로, 있는 그대로 본다면 한 인간의 목소리에 지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께선 왜 이런 표현을 하셨을까. 왜 이 잔을 옮겨달라고 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원대로 해달라는 간청으로써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셨을까.

 

예수는 십자가에 달리셔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아래 말씀은 위 표현들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Eloi Eloi lama sabachthani?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가복음에는 예수의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이 이것이 다였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우리는 이러한 예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단순히 결과를 짜놓은 듯 기독방법론으로만 생각하기엔 예수의 이 말씀들은 보통의 말씀이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 예수께선 죽음을 피하기를 원하시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죽음을 받아들이듯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기를 원한다고 하셨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죽음이 가져올 고통 또한 예견하고 있었을 것이다. 제자들의 배반들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제자들의 자는 모습을 보고 '육신이 약한 것'을 이야기하셨다. 누구도 그의 죽음에 동참할 수 없었고 거들수 없었다. 그는 홀로 그 죽음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했던 것이다. 마지막을 향해. 그렇게 그는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예수님의 입장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6-8

 

 

영어로 보면 좀 더 명확해진다. 

 

made Himself of no reputation / 그 자신이 스스로 명성없는 자가 되었고

taking the form of a bonservant / 노예의 형상을 취했으며

and coming in the likeness of men / 사람처럼 나타나셨고 

He humbled himself / 스스로 낮추셨으며

and became obedient to the point of death / 죽음의 지점까지 복종하셨다. 

even the death of the cross / 심지어 십자가의 죽음까지. 

 

 

 

 

왜 예수께선 자신을 버리신 것일까. 왜 이렇게까지 죽으신 것일까. 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일까. 우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해봐야 한다. 왜 복종을, 죽기까지 복종하심을, 십자가에 죽으심을.  

 

바울은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고(고전 2:2).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고.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신 것이라고(고후 5:21). 

 

그리고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롬 4:9). 그 믿음.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는 길을 여는 오직 한 방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목 박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우리를 대신해서 돌아가신 것이다. 그 고통의 과정을 예수께선 숨김 없이 보여주셨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그 길을 가신 것이다.  

 

제자들은 그런 예수님을 앞에 두고 졸고 있었다. 심지어 예수를 판 가룟 유다가 장정들을 이끌고 왔다. 우리의 모습이라고 다를게 있을까. 모든 인류는 예수 앞에 이런 죄인들인 것이다. 결코 그 죽음에 공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심히 배반적이며 흉악할 뿐이다. 과연 내가 나 대신 죽으신 예수의 고통스런 마음 앞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졸고나 있지 않으면 다행이다. 베드로가 흘린 눈물, 그것이 그만의 것이겠는가. 아니다. 바로 나의 것이기도 하다. 내가 흘려야 할 눈물인 것이다. 나도 배신자인 것이다. 할 말 없는 인간인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의 죽음 앞에 할 말을 잃는다. 그저 부활하신 예수 앞에 옷을 두르고 물로 뛰어들어가는 것 외엔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나머진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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