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유한하다. 또한 영원하다.
니체는 이 사이에서 극심한 고민에 빠졌고, 어쩌다 미쳐서 죽었다. 영원을 찬양하는 기독교인들은 그런 죽음을 또한 기뻐할지도 모르겠다. '그것 봐라, 신을 죽었다고 한 자의 말로를.' 아 천박한 자들이여.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니체만큼 삶의 현실성을, 생의 건강함을, 육체와 정신의 도약의 기쁨을, 자신의 소중함을 말한 사람도 없다. 그는 그것을 거부하고 방해하는 모든 사상과 맞서 싸웠다. 자신을 낮추게 하고 비하하게 만들며 삶을 피폐하게까지 만드는 모든 것을 공격했다. 그 근본을 그는 기독교로만 보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점을 오해한다.
그는 플라톤주의의 이데아를 공격했다. 그것의 현실태인 기독교를 부정한 것이다. 근본은 플라톤이다. 그에게 신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다. 인간의 영과 혼을 말살해 육신까지 망쳐버릴 모든 거짓된 신이다. 그런 신에 대한 사망선고를 말한 것이다. 이것을 인간으로서 어찌 잘못됐다 하겠는가. 나는 니체 안에서 바울을 발견했고, 좀 더 확실한 전도의 방법을 발견한 기분이 든다.
성경이 단단히 미쳐 살았고, 그 책만을 현재도 고집하는 사람인 나는 이것을 거부할 자신이 없다. 나를 아는 지인들이여, 내 말을 들어보라.
위대한 양식을 만드는 것, 즉 자신의 행복과 불행에 대해서도 주인이 되는 것.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독립적인 속편을 위한 초안과 사상, 1885, 415쪽
최근 하이데거가 쓴 '니체'를 읽으며 여러 생각을 하고 있다. 서양 철학의 흐름 또한 공부하며 현대인이 삶을 바라보는 구조적 인식을 생각하고 있다. 태어나면서 교회에 나갔고, 고등학생 때 성경 열 번 완독을 끝내며 '내 나이 대 가장 성경을 많이 본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산 내게 플라톤의 이데아는 그럴싸한 것이었다.
생각해보라. 플라톤은 현실이 완벽하지 않다고 했다. 이데아의 세상이 따로 있고 그곳에 존재자의 진짜 존재가 있다고 봤다. 삶에 대한 집착을 잘못된 것으로 봤으며, 완벽한 이데아만을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다 보니 그는 감성적인 것을 되도록 제압하려고 했고, 초감성적인 것을 존재의 근본이라 말했다. 어디서 많이 듣던 말 아닌가?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골 3:2
니체에겐 플라톤이나 기독교나 매한가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기독교 이전에 플라톤이었으며 기독교는 니체에게 '민중을 위한 플라톤주의'일 뿐이었다.
니체가 이런 생각과 사상에 염증을 일으킨 근본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그에게 본질이 무엇이냐를 물었을 때 돌아오는 결론적 답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이상향은 아니라는 것이다. 현실을 거짓이라 생각하고, 가짜라 보기 시작하면 자칫 자기 자신까지 부정하기에 이를 수 있다. 이단과 사이비 종교인들이 자주 이용하는 방법도 그렇지 않은가. 어차피 휴거가 곧 도래할 것인데 재산은 모아 뭐하고, 나를 위해 살면 뭐하냐는 식의 매우 천박하고 단순 무식한 소리를 내지 않는가. 이단의 전통적 속임수는 여기서부터 파생한다.
천국의 담보는 현실에서 만들어진다. 현실을 부정해선 안 된다
그런데 이런 이단들의 극단적 속임수가 아니라도 기독교를 잘못 이해하면 니체가 경고했던 '노예근성'을 자기 자신에게 굴레로 씌워버릴 수 있다. 즉 이런 생각들. '나는 언제나 죄인이며, 용서를 구해야 하고, 나의 생각은 신의 생각과 배치된 것이므로 몇 가지 안 좋은 일은 하나님의 채찍이다, 그러하기에 나는 징계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교제 자리에서 이런 식의 자기반성하는 것이 뜸하지 않게 나타난다. 마치 무슨 법칙이라도 있는 것 같다.
그것이 과연 성경적일까? 나는 아니라고 확신한다. 잘못된 것은 반성하고 회개하고 자백해야겠지만 그것이 기독교인의 근본 자세가 아니라고 확신한다. 바울의 말은 그것을 근본에 두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믿음의 '확신'을 말했으며, 십자가의 '자부심'으로 가졌고, '항상' 기뻐할 것을 말했다. 영혼의 이상향만을 말하지 않고 육의 건강함도 말했다.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까지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사전 5:23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가능태를 이야기했다. 그것은 미래를 담보한 자세이긴 하나 현실에서 이뤄져야 할 의지의 힘인 것이다. 니체 철학의 처음과 끝이 '힘에의 의지'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나는 니체나 바울이나 생명의 소중함과 현실의 귀함을 말한다는 점에서 다를 게 없다고 본다.
살아 있음에 감사하다
니체는 예술을 찬양했다. 음악은 니체에게 삶의 자극제였다. 그림은 그에게 창조의 행위였다. 감성적인 것이 진실이기에 예술은 그 감성의 표출이다. 그런 예술이야말로 니체에겐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진리의 표현 방식이다.
플라톤? 그에게 예술이야말로 배척해야 할 무언가였다. 감성적인 것을 규제하고 제약해야하는 마당에 예술이 웬말이냐. 플라톤이 살아 있다면 현재의 모든 예술적 작품들은 불태워야 할 첫 번째 목표가 된다. 얼마나 무서운 사상인가.
기독교의 방식대로 '위엣 것'을 사모하며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고, 하늘에 있는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은 결코 부정과 회피가 아니다. 현재의 나 자신을 돌아보고, 건강함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며, 영혼육의 강인함과 질적인 도약을 위해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는 데 기독교인의 자세가 있다. 삶의 적극적인 긍정이야말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추구할 신앙의 자세이다.
니체는 미쳐 죽었어도 결코 자살하지 않았다. 니체는 미치는 순간까지도 삶을 긍정하려 노력했다. 처절하게 삶을 부정하려는 자들에게 맞서려 했다. 그렇게 본인은 실패했어도 그 생각은 실패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행복만 아니라 불행까지도 자기 것으로 긍정했고, 주도적 관점에서 모든 걸 생각했다.
니체를 읽고 앉아 있으면 나는 누군가의 이 한 마디 외침이 생각난다.
살아 있음에 감사하다.
니체의 '대지에 충실하라'나 살아있음을 긍정하는 것이나 다를 게 없다.
'신은 죽었다'는 '삶을 긍정하라'라는 말을 좀 과격하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생각은 죄의식에서 벗어났다는 긍정이지 않은가.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울증에 고통받고, 여전히 자신을 부정하며 약한 생각에 처하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답답함을 느낀다. 삶을 부정하고 멀리 뵈던 하늘나라만 외치는 것 아닌가 하여 걱정된다.
예수의 말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는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혹시 잊고 사는 것 아닌가 싶다. 우리는 현재에 감사해야 한다. 철저한 자기 긍정과 죽는 날까지 도약하고자 하는 삶의 의지를 내 안에 품고 살아야 한다. 그런 말을 니체가 했다고 부정할 것도 아니다. 바울이 했다고 무조건 긍정하는 이분법적 사고도 필요 없다. 다 맞는 말을 한 것이다. 우리는 삶을 긍정해야 한다. 나 자신은 소중하다. 비록 힘든 세상에 있지만. 말없이 떠난 친구에게 이 말을 못 해 미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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