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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이야기

부정적인 생각을 피하려면, 일단 감사하자

by 하 루 살 이 2021.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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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음에 감사합니다

 

 

어느 늙은 강연자가 이 한 말을 했다. 살아있음에 감사하다.

나이가 70살 이상된 노인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건강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건강지식도 많아 보였다. 백발이었지만 몸 움직임은 가벼워 보였고,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다. 

 

그런 그가 한 마지막 한 말은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한 일'이었다. 나는 그의 진지한 표정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 한마디에 집중하는 그를 보며 건강의 지혜가 바로 저런 것에 있겠구나를 생각했다. 다른 말보다 그 한 마디 말이 기억에 강하게 남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인간 삶의 목적이 되어 있는 '돈'. '행복', '감사한 일'에 대한 기본 관념 자체가 바뀌는 경험을 한 것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이 돈의 많고 적고를 행복의 기준으로 삼는다.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자본주의 세상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의 정신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현재에 만족하는 법을 지금이라도 배우지 않는다면 돈을 얻는 그 과정들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결국에 돈을 많이 벌고 나서도 결국 한도 없는 목표 설정으로 인해 우리는 부함에도 쉽게 불행을 느끼는 수렁에 빠쥘 수 있다. 어느 정도가 되어야 행복하다는 걸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를 가장 행복하게 해줄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돈이 아니라 바로 현재의 나 자신의 조건이다. 곧 살아있다는 이 기적에서부터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깊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적은 돈에서도 감사를 배우는 법이며, 돈을 모아가는 과정도 행복한 일이 되는 것이다.

 

나는 노인의 강연과 비슷한 메시지를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세로토닌' 전파자 이시형 박사의 메시지다.  

 

 

www.youtube.com/watch?v=f3x_oIJFmEc

 

 

나는 유튜브에서 '생로병사'를 즐겨 본다. 건강한 신체를 가졌지만 나는 생로병사에 나온 이시형 박사의 영상을 보면서 건강과 관련해 또 하나의 중요한 힌트를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영상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 습관을) 한 40년 동안 했습니다. 

눈이 보인다. 귀가 즐겁다. 몸이 움직인다.

기분도 괜찮다. 

 

고맙다. 

 

 

아,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이 문장들에서 충격을 받는다. 영상 속 이시형 박사는 87세다. 그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저 말을 읊는다. 눈이 보인다는 것, 귀가 들린다는 것, 몸이 움직인다는 것, 그리고 기분이 괜찮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 한 마디. 고맙다. 이 말을 내가 하고, 그 말을 내가 듣고, 그리고 행동이 반복되는 절차. 이것이 곧 나의 가장 작지만 무엇보다 소중한 그 무엇을 지각하게 하는 위대한 한 마디가 아니고서야 무엇이겠는가. 

 

 

출처- 생로병사의 비밀 유튜브 방송 캡처

 

 

나는 이 영상을 본 이후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생각해보자. 인간은 곧장 부정적인 생각에 쉽게 사로잡히는 존재다. 뇌 구조가 그렇게 시스템 되어 있다. 우리의 기억은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을 기억하는 데 더 발달되어 있기 때문이다. 곧 가만히 있을 때 즐거운 것보다 원치 않는 부정적인 과거, 억울했던 일들, 가해자의 얼굴, 그리고 피해자라는 인식에 쉽게 사로잡는 것이다. 사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인생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안다. 가장 중요한 것,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은 부정적인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는 점을. 그리고 현재 나는 살아있고, 내 눈은 무언가를 볼 수 있으며  이 귀는 여전히 듣는 데 부족함이 없다는 것. 그리고 건강하다는 이 사실. 이 중 하나라도 할 수 없어 고통받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이 중 하나라도 할 수 없어서 간절히 그것을 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조금만 노력해 생각해보면 우리의 인생은 기적의 연속임을 알 수 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I may received my sight.

 

 

마가복음에 나오는 여리고의 소경 바디매오의 한 마디 말이 떠오른다.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냐'는 예수의 질문에 소경은 이렇게 말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제자 야고보와 요한은 어떠했는가. 같은 질문에도 그들은 높은 자리를 언급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소경은 달랐다. 그에게는 '본다'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 갈망만이 있었을 뿐이다. 보통의 존재가 된다는 것이 그에게 어떤 부해짐보다 간절한 대상이 됐던 것이다. 

 

 

 

본다는 것.

내가 지금 볼 수 있다는 것. 더 나아가 나는 볼 수 있는 살아있는 존재라는 것. 모든 철학의 중심은 실존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있지 않던가. 하지만 그것은 그리 복잡한 문제가 아니다. 생각하고 있는 이 존재가 현재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기적을 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감사해야 하겠는가.

이시형 박사의 말대로라면, 소경 바디매오의 말대로라면, 살아있음에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곧 우리에게 감사할 일은 차고 넘친다. 숨 쉬는 것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감사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 내가 잠을 청할 수 있음에도, 그리고 깨어남에도, 생각하고 있음에도, 걸을 수 있음에도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그럴 수 있다. 우리는 그렇게 부정적인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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