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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이야기

유병언 시체가 놓여지던 날들

by 하 루 살 이 2020. 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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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병언 회장이 타살됐다고 확신한다.

 

유병언 회장이 자살했을까? 그는 마지막까지 삶의 의지를 불태운 사람이다. 주진우 기자가 공개한 유 회장의 자필 문서에도 '내 노년의 비상하는 각오와 회복되는 건강을 경험하며…'라는 내용이 나온다. 자살하는 자의 태도로 보기 힘들다. 

 

자연사는 어떤가.

유 회장이 밤 중 '저체온증'으로 자연사했다는 가설이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죽음과 그 죽음 주변에 나타난 흔적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자연사로 보기 힘든 증거들이 많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 흔적들은 '자연사라고 받아들여라'라고 누군가가 만들어낸 것처럼 보일 만한 것들이다. 이런 점들을 살펴보고 있자면 자연사야 말로 자살설보다 더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진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것이다. 유병언의 죽음을 보면 그의 죽음은 자살도 자연사도 아닌 '타살'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진 출처 KTV 유튜브 영상 캡쳐

 

 

1. 매실밭 주인의 행동을 조사하면 '유병언 회장이 곱게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매실밭 주인 박 씨를 만난 나는 그와 함께 매실밭에 올라갔다. 박 씨는 유병언의 시체가 발견된 곳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을 나는 어떻게 알고 있느냐. 인터넷에는 그의 시체가 발견된 장소를 촬영한 온갖 사진들과 드론 사진들이 즐비하다. 그것만 조사하고 밭에 가도 시체가 어디에 놓였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내가 박 씨와 함께 매실밭에 올라갔을 때, 나는 이미 시체가 발견된 곳을 알고 있었다. 그래 놓고 박 씨에게 물은 것이다. 박 씨도 정확히 그곳을 짚었다. 

 

문제는 이것이다. 그도 타살설을 받아들인 사람이다. 그가 직접 "누가 옮겨다 놓은 것 아니냐"라고 말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봐도 이상하기 때문이다. 시체가 놓은 모습이나, 풀들의 모습들, 그리고 왜 하필 그날 '반백골화' 된 시체를 발견한 것인가. 온전한 시체도 아니고.

 

유병언 회장이 사라진 다음날 아침 폴리스라인이 쳐진 뒤로 문 시건 장치위에 시퍼런 식칼이 꽂혀 있었다. 새벽 중에 누군가가 왔다 갔다는 의심이 언론계에 퍼졌지만, 누구도, 심지어 구원파도 이 점에 대해 문제제기를 심각하지 하지 않는 듯 하여 나도 그냥 더 말하기를 그쳤다.

 

 

나는 그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그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는 나와 만나기 직전 매실 밭을 한번 둘러보고 다시 자기 집으로 갔다. 나는 그것을 멀리서 다 보고 있었다. 그래 놓고 그의 집을 찾아가 그를 만난 것이다. 특히 나는 그를 만나기 전에 유 회장의 시신이 발견된 매실밭 옆에 있는 작은 가옥에 들렸다. 그곳에 사는 할머니에게 "박 씨가 5월 말부터 6월 중순까지 하루에 얼마나 자주 밭에 갑니까"라고 물었다. 할머니는 박 씨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행동도 마찬가지였다.

 

할머니를 통해 나는 그가 6월이면 하루에도 몇 번 씩 매실밭에 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유병언이 5월 25일 송치재 별장에서 사라진 뒤 6월 12일 시체가 발견되기까지 만약 시체가 자연사해 온전한 상태로 누웠다면,

 

그날이든 다음날이든 박 씨는 분명히 유병언을 온전한 상태로 발견했어야 한다. 그런데 그는 반백골화 된 시체를 발견했다. 절대 썩어문드러진 시체가 발견되면 안 된다! 그럼 풀이 가지런히 누워 있으면 안 된다. 반백골화된 시신을 풀이 덮어야 한다.

 

그래서 밭 주인 박 씨도 "누군가 옮긴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 말은 유병언의 시체가 어딘가에서 사인이 불분명한 상태로까지 썩은 뒤 누군가에 의해 매실밭 자리에 놓여졌고 6월 12일 이른 아침에 박 씨에 의해 발견됐다는 것이다. 

 

6월 초경에 직접 순천 송치재 별장을 찾아 찍은 사진들이다. 

 

 

2. 2014년 5월 24일 밤의 일들도 기억해야 한다.

 

송치재 별장에서 유병언과 헤어진 운전기사 양 씨는 차로 약 10~15분 거리에 있는 야망연수원으로 갔다. 잠을 청하려는데 25일 새벽에 스타렉스 한 대가 야망연수원으로 온 것을 발견한다.

 

나도 훗날 이 야망연수원을 방문했다. 낮에도, 밤에도 그곳과 그 주변 분위기를 살폈다. 그 안에 들어가 2층 침실들도 모두 살폈다. 야망연수원은 숲 속 깊은 곳에 위치한 건물이다. 깊은 밤 중에 확인해 본 결과 차 한 대 없는, 가로등 하나 없는 매우 어두운 장소였다. 그곳은 밤에는 차가 없이는 가기 힘든 산속 깊은 곳이었다. 스타렉스가 새벽 중에 올리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양 씨도 놀랐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들은 것은 "유병언 유대균이 여기있다"였고, 결정적인 말은 "세콤을 어떻게 해제하지?"였다. 다시 말해 그들은 검찰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갑자기 전화를 받더니 어딘가로 '그냥' 가버렸다. 이 말은 곧 검찰은 더더욱 아니라는 말이다. 운전기사 양 씨는 차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전화하는 걸 들으니 한 팀이 아니고 몇 팀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 그 시간이 25일 새벽 3시경이었다. 

 

3. 검찰은 어떤가.

 

검찰은 5월 25일 오후 4시쯤 별장을 급습했다. 새벽 3시와 같은 날 오후 4시의 긴 시간 차이를 기억하라!

 

별장에는 분명 유병언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알 듯 그는 벽장에 숨어 있었다. 신 모 여인이 나와 영어를 써가며 항의했고, 검찰은 법원의 영장을 받아 밤 9시 30분이 되어서야 별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검찰의 본모습이다. 용의자가 있을 것으로 의심되는 곳의 "세콤을 해제하자"라든지 전화를 받고 이유도 없이 그냥 차를 돌린다는 것은 검찰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다. 유병언을 잡아(죽여)야만 하는 다른 무리나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 모 여인도 "밤중에 누군가가 왔다갔다"라는 진술을 검찰에 했다. 

 

이 외에 나는 몇 가지 더 힌트를 얻었고, 그것은 위 포스팅에 담겨 있다. 여기서 나는 한 발자국 더 들어간다. 매우 중요한 것 하나를 빼먹었던 것이다. 

 

 

바로 날씨다. 

 

 

5월 25일부터 6월 12일까지는 약 18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보면 시체는 보름이면 반백골화가 가능하다. 그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아래 두 자료를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기상청과 케이웨더 사이트를 보면 2014년 6월 12일 유병언의 시체가 발견된 날과 그 전날의 날씨를 알 수 있다. 둘 다 비가 왔다.

 

 

그리고 특이하게  유병언의 시체가 발견되는 12일에 '천둥'이 친다. 

 

 

이것을 잘 생각해보라.

 

만약 유병언 회장이 다른 곳에서 누군가에 의해 죽었고, 사인이 불분명해질 때까지 어딘가에 있었다고 보자. 그런 가운데 송치재 별장에서 그리 멀지 않아 보이는 곳인 매실밭이 시체를 놓일 적당한 장소로 여겨졌을 때 범인들이 할 일이 무엇인가. 

 

간단하지 않은가.

모든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시체를 놓아야 한다는 것. 이것 하나밖에 더 있는가. 모든 사람의 눈을 피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럼 선택은 하나다. 새벽 밤 중을 택하는 것. 더 좋은 타이밍이 있다면 '비가 오고', '천둥이 치는' 날이다. 그래야 새벽 중에다가 비까지 오는 상태니 어느 누구도 밖에 나올 생각을 못할 테니까. 

 

 

 

https://wpalss.tistory.com/1399

 

'나는 신이다' 그리고 유병언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다큐 '나는 신이다: 신이 배신한 사람들' 4편 오대양 관련 영상을 재밌게 봤다. 보는 내내 편집술과 음향 기법에 감탄을 했다. 편집 경험이 있는 만큼 그 능력을 칭송한다.

wpalss.tistory.com

 

 

유병언 회장은 도망갈 이유가 없었다. (위 포스팅의 글을 읽어보라. 오대양의 뼈아픈 사건이 유병언에게 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왜 순천에 갔겠는가.

그에게는 1991년 7월의 경험이 있었다. 당시에도 언론과 여론은 그를 매몰차게 오대양의 범인으로 몰아붙였다. 그는 대전지방검찰청에 나갔다. 그런데 오대양과 아무 관련이 없는 과거에 무혐의 받았던 것으로 결국 4년 형을 확정받았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그는 언론이 씌워놓은 '오대양의 주범'으로 살아야만 했다.

 

그가 얼굴을 드러내고 사진전을 하지 않은 것도 이런 과거의 고통이 작용했으리라 본다. 그 억울함 때문에 더 이상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기 싫었던 것이다. 그 억울함 때문에. 그가 출두 직후 월간조선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한 말도 이것이다.

 

 

내가 왜 오대양 배후라는 멍에와 누명을 쓰고 살아야 합니까? 

원통할 때마다 어금니를 깨물며 억울함을 참습니다.

 

 

 

그는 세월호 사고 직후 오대양 때와 똑같이 펼쳐지는 돼지머리 수사와 여론몰이에 일단 순천으로 내려간 것이다. 억울하더라도, 비겁자라는 욕을 들어도 말이다.

 

검찰에 출두해서 더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보다, 오대양 때처럼 또다시 세월호 사고 전체의 주범으로 평생을 살기보다 일단은 사고의 원인이 어느 정도 먼저 밝혀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역지사지로 보자면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가 그를 죽일 이유는 없었다고 본다. 왜냐. 유병인이 죽는 것보다 차라리 그를 살려서 비참한 꼴로 검찰 포토라인에 세우고, 법정에도 세우고, 세월호의 모든 책임을 뒤짚어 씌워 그와 관련된 모든 재산을 가져오는 것. 그럼 세월호 수습 비용도 세금으로 쓰지 않고 얼마나 좋은가. 그가 죽음으로 나타났을 때 제일 아쉬워했을 쪽도 박근혜 정부 아니었을까?

 

'공소권 없음'으로 다 끝나버렸으니까. 

 

정말로 그를 죽이고 싶었던 자들은 누굴까.

 

세월호의 사고 원인을 잘 들여다보면 뭔가 열쇠가 나온다. 세월호가 정말로 과적이나 복원성 불량으로 사고났을까? 만약 외력 문제가 세월호에 발생했다면? 그때는 유병언은 '죽어줘야 되는 인물'이 되지 않았을까? 유병언으로 모든 여론을 다 덮어버리는 마지막 수단, 곧 '의문의 죽음'이 아니겠는가. 그의 죽음에 관여된 자들은 누굴까. 과연 야망연수원에 온 자들은 누구일까.

 

타살을 부인하고 싶으면 이 모든 것을 부정하라. (이 외에도 더 많지만 글이 길어지기에 여기서 끊는다.)

 

나는 끝까지 밝혀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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