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으로 말하다 31] 예수의 마지막 7일, 여인과 기름부음 그리고 메시아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막 14:3-9
나는 이 여자의 행동을 생각할 때마다 깊은 감명을 받는다.
예수께선 언제나 가난한 자들을 통해 우리에게 지혜를 보이셨다. 가난한 자들의 적음은 예수 앞에 부자의 부함보다 큰 것이었다. 여기 한 여인의 행동 또한 무수한 남자들의 호언장담과 과시행위보다 훨씬 더 고귀하고 우아했다. 예수는 복음이 전파되는 어느 곳이든 이 행위를 기념하도록 하셨다. 이유가 무엇인가.
먼저 나는 향유의 부어짐이 수요일에 있었다고 본다. 몇몇 성경 학자들은 이 사건이 수요일에 일어나야 한다는 근거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아니다'라고 말할 근거 또한 없다. 마가복음에서 예수의 마지막 7일이 하루의 나눔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을 수요일로 생각하지 않으면 수요일은 그야말로 예수의 마지막 7일 중 '침묵의 날'이 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침묵의 날이라는 것이 훨씬 더 근거 없는 추정 아니겠는가.
오히려 가룟유다가 이 옥합 사건 직후 대제사장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주겠다고 한 것을 볼 때, 그리고 다음 목요일 밤 예수께서 유다의 배신에 의해 잡히는 것을 볼 때, 이 옥합 사건이야말로 수요일에 있었던 일로 봐야 하지 않겠는가.
유대 왕이 되는 자의 머리에는 언제나 기름이 부어졌다. 다윗도 그러했으며 솔로몬도 마찬가지였다. 사울과 다윗의 머리에 기름은 사무엘이, 솔로몬의 머리에는 제사장 사독이 부었다.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다윗)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삼상 16:13
제사장 사독이 성막 가운데서 기름 뿔을 가져다가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으니
이에 양각을 불고 모든 백성이 솔로몬왕 만세를 부르니라.
왕상 1:14
대제사장에 의해 기름이 부어지고 이로부터 왕이 백성에게 선포된다. 백성은 '만세'를 부른다. 성대한 왕의 이관식 중심에 기름부음이 있었다. 히브리어 '메시아 Messiah'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다. 희랍어로 메시아는 크리스토 Christos가 된다. 곧 그리스도라 부른다.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아, 곧 왕이시라는 뜻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왕으로서 인정되는 기름부음은 어떠했는가. 대제사장과 선지자가 나타났는가. 백성들의 환호가 있었는가. 화려한 왕궁에서 이뤄졌는가. 아니다. 정반대였다. 예수의 기름부음은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이뤄졌으며 그에게 기름을 부은 사람은 대제사장과 선지자도 아니었다. 오직 이름 없는 한 여인이었다(마가복음은 이 여인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다). 유대 방식대로 계수함에도 들 수 없는 한 여인 말이다. 힘없고 보잘 것 없는 여자가 예수에게 기름을 부었다.
예수께선 그렇게 왕으로 선포되시고 그 기름부음을 죽음과 연결하셨다. 통치가 아니라 버려짐으로, 권세가 아니라 희생으로 말씀하셨다.
가룟 유다는 그것으로 예수의 배신을 결정한다.
가룟 유다(Judas Iscariot)에서 이스카리옷은 시카리(Sicarii, 단검)이라는 뜻이다. 즉 가룟 유다의 경우 다른 제자와 달리 혁명을 꿈꾼 열심당원과 같은 인물로도 해석된다. 가룟 유다야말로 셈에 능한 자였기 때문에 베드로와 달리 교육받은 자로 볼 수 있다. 그만큼 로마에 복속된 상황에서 예수야 말로 진정 유대 민족을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 줄 인물이라고 봤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예루살렘 입성 후 보여준 모습은 혁명이 아니었다. 결국 여인네의 기름부음을 보고, 그는 대단한 실망감을 느꼈을 것이며 결국 은삼십에 예수를 팔고야 말았을 것이다. 역사를 보면 자신을 의롭고 정의롭다 여기는 이들이 가끔 상황을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가룟 유다가 그런 케이스였다.
하지만 예수는 열심당원들처럼 겉으로 드러난 혁명을 꿈꾸지 않았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내면의 변화를 원하셨다. 보이지 않는 믿음을 원하셨다. 전통과 관습, 율법의 구속이 아니라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사람들이 알고 따르기를 원하셨다. 안식일은 인간을 위해 존재할 뿐 인간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지 않듯, 마음으로 간음한 자도 간음한 자이기에 누구도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칠 수 없듯, 하나님의 나라는 지상이 아닌 마음에서 이루어지듯. 예수의 혁명은 조용한 혁명이었다. 영혼의 혁명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왕됨을 인정한 인간은 겉으로 드러난 속박이 아닌 보이지 않는 죄로부터의 해방을 경험한다.
그의 장사를 위해 가장 천하고 고통받는 여인이 조용히 나섰다.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죗짐에서 벗어날 길 없는 고통받는 영혼을 위해 오신, 낮고 천한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를 위해 여인이 기름부음에 나섰다. 그렇게 예수야 말로 진정 낮고 천한 몸으로 오신 분이셨던 것이다. 그분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분이셨다. 우리에겐 이러한 그리스도가 계시다. 우리는 이 사실을 땅끝까지 전파해야 한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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