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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네덜란드 여행에서 만난 스피노자

by 하 루 살 이 2020.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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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네덜란드라 했으나 정확히 말하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만난 스피노자'라 함이 더 옳겠다. 스피노자를 알게 되면 네덜란드가 역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었는지 알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비슷하겠지만 도시 여행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선 그 도시의 역사와 그곳에서 살아간 유명한 이들의 이야기를 알 필요가 있다. 마냥 그 도시를 여행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고된 일이다. 그저 사진과 영상에서 보던 건물과 거리를 실제로 본다는 것 외에는 다를 게 없기 때문에 그런 감상은 몇 시간 뒤며 금방 사라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한 역사를 살아간 인물들을 알고 돌기 시작하면 내가 있는 장소는 특별해진다. 가령 이른 아침 낡은 한 카페에 들어가 진한 커피 한 잔을 시켜 들고 밖을 내다보는 경험도 매우 특별할 수밖에 없다. 암스테르담에 살아간 렘브란트나 고흐도 비슷한 행동을 했을 것이란 상상, 스피노자도 온갖 모진 비난을 피해 도착한 암스테르담에서 이렇게 잠시 휴식을 취하지 않았을까 하는 기분 좋은 호기심이 여행을 좀 더 밝고 즐겁게 만들어준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모습.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본 암스테르담도 그러했다. 날도 밝고 사람들의 표정도 밝았다. 이른 아침에 보이는 풍경이 서울과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암스테르담을 상업도시라 볼 수 없기에 서울과는 분명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결코 도시적이지 않았고 시골의 한 풍경을 그들 나름대로 잘 적용해보려 노력한 흔적들이 곳곳에서 보이는 도시였다. 

 

골목을 지나다니다 보면 소설 어딘가에서 읽었던 장면처럼 빵집에서 나오는 고소한 빵 냄새가 길거리를 채워나갔고, 반지하 창문을 통해 보이는 한 여성은 밤일을 마치고 짐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나 같은 이방인에게도 미소를 지어 보낼 만큼 마음에 여유가 있었다. 

 

 

이 도시가 이런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비결에는 특별한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남들이 다 알만한 역사보다도 다른 역사 하나를 소개하고자 하는데 그것은 바로 철학자 '스피노자'이다. 

 

유대인으로서 태어난 그가 종교적 차별을 피해 택한 곳은 네덜란드였다. 동족 유대인에게도, 기독교인에게도 모두 비난받고 버림받은 그를 받아준 곳이 네덜란드였던 것이다. 러셀도 자신의 책 서양철학사에서 스피노자와 네덜란드와의 특별한 관계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스피노자의 정치적 평판이 나빴는데도 자유주의를 표방한 네덜라드 정부는 신학 문제와 관련된 그의 견해를 관대하게 봐주었다. (중략) 네덜란드에서는 국가가 교회보다 훨씬 관대하게 종교 문제를 처리했다. 

서양철학사 p.721~722

 

그리고 러셀은 데카르트를 설명하면서도 역시 네덜란드에 대한 설명을 빼먹지 않았다. 

 

데카르트는 단기간 프랑스를 몇 번 방문하고 영국을 한 번 방문한 일을 제외하면 20년(1692~1649) 동안 네덜란드에서 살았다. 17세기에 네덜란드가 사상의 자유를 인정한 나라로 중요하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홉스는 저술한 책을 네덜란드에서 인쇄해야 했으며, 로크는 1688년 이전 영국에서 반동정치가 행해진 최악의 5년 동안 네덜란드에 피신해 있었다. 또한 벨도 자신이 네덜란드에서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며, 스피노자 역시 네덜란드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연구 활동을 계속하기는 거의 불가능했을 터다.

서양철학사 p.708~709 

 

사실 스피노자 하면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나 그의 철학에 대해서는 사실 잘 아는 사람이 드물다.

그는 유대인이나 유대인과 기독교인 모두에게 미움을 받았다. 하지만 이는 매우 큰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야말로 신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가득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참 아이러니 하지만 나는 그 이유를 조금은 알 듯도 하다. 종교만큼 편협하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이 편협한 것이 없다. 특히 교회 조직은 더욱 그런 측면을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조직이다. 그들이 가진 전통적 시각이라는 것에서 조금이라도 반한 생각과 행동을 보이면 가차 없이 매도질을 가하는 것이다. 중세는 그것에 더 심각해져서 사람을 죽여도 양심에 가책 하나 느끼지 못했던 마비된 시대였다는 것을 모두가 잘 안다. 

 

네덜란드에 있는 스피노자 동상

 

스피노자는 시대의 피해자라 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신을 향한 사랑은 정신의 영역에서 최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라고 말할 정도로 신에 대한 깊은 고찰을 한 사람이다.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봤던 것이다. 거기에 지혜가 있다고도 봤다. 참된 자유함도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다고 봤다. 

 

데카르트는 실체를 신만 아니라 개인의 정신과 물체도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달랐다. 그는 오직 신만이 실체라고 봤다. 그 외의 것은 실체라 말하기 매우 곤란했다. 모든 것은 변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변화에 매우 취약한 존재다. 모든 사물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신만은 다르다. 신은 모든 것의 근원이고 그 근원을 창조한 존재며 모든 창조된 것을 무화시킬 능력도 가졌다. 그런 존재기에 신의 속성을 알아가는 일, 즉 신을 알아가는 일이 우리 삶에 가장 중요한 일이 되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신과의 연결'에 대한 철학에 이어서 또한 중요하다고 볼 점은 바로 '인간이 자유롭게 되는 방법' 제시에 있다. 그는 변화하는 세상, 쉽게 상처 받는 인간의 감정에 우리 스스로가 치우칠 필요가 없다고 봤다. 모든 불행은 우주적 관점이라는 큰 그림에서 볼 때 매우 작은 한 사건에 불과하다. 결코 큰 불행으로 여길만하다고 그는 보지 않았다. 그러하기에 감정에 휘둘리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되다고 그는 부탁했다. 누군가에 대한 복수의 마음도 그렇기에 결코 최선의 방법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그는 아무리 큰 불행을 겪어도 그 안에 갇히지 말라고 조언한다. 오히려 그것을 자연의 한 일부로서 이해하자고 그는 말한다. 증오도 극복할 수 있다. 사랑의 힘으로 없앨 수 있다. 어떤 불운도 창조 이후로 이어진 인과 체계의 일부일 뿐, 결국 이를 받아들이는 것도 조화의 과정인 것이다. 동족과 주변인들에게 버림받은 그가 수모와 모진 오해들을 이겨내고도 그 아름다운 표정을 간직할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이런 사유를 통해서 가능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를 받아준 네덜란드 또한 얼마나 자유롭고 아름다운 나라인지 다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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