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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이야기

구원파와 깨달음

by 하 루 살 이 2023.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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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골로새서 1:6

which is come to you, as it has also in all the world, and is bringing forth fruit, as it is also among you since the day you heard and knew the grace of God in truth  Colossians 1:6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나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말씀을 믿는다. 아울러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다시 오실 주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엡 2:8)고 그것으로 인해 율법의 해방을 맛보았다. 그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나는 자유함을 느끼고 있고, 지금도 그러하다. 

 

아주 정상적인 믿음의 간증이라고 기독교인 어느 누구라도 인정하고, 또한 이 말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마틴 루터와 함께 개혁가 그룹을 보여주는 그림.

 

 

믿음에 대해서도 루터는 '갈라디아서' 주석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믿음은 오직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죄사함과 영생이 있음을 인정한다.(마르틴 루터의 갈라디아서 p.113)" 다양한 표현 중에 '인정한다'라는 표현을 썼다.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그 자세를 설명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믿은 자의 그 상태, 모든 것을 인정하는 그 상태, 예수의 피흘리심이 나를 의롭게 하셨다는 그 사실을 깨달은 날부터 우리에게 펼쳐지는 그 해방의 빛을 무엇이라 말하겠는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누구보다 성경을 가까이 한 사람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구약 10번 완독이 끝났고, 그때 '그렇다면 신약은 몇 번 읽었더라'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하루는 신약, 하루는 구약을 읽었으니 신약은 말할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숫자를 세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여겨 지금까지도 숫자를 세는 어리석은 장난은 하지 않는다. 

 

이 교만해 보이는 말은 무엇을 말하겠는가. 어떤 목사라도, 어떤 전도인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보다도 '당신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살피겠다'는, '당신의 말씀을 사랑하는 그 마음은 누구한테도 뒤지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그 마음이 내 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박물관에서 직접 찍은 사진. 그가 그린 성경.

 

 

기독교인들이여 잘 생각해 보라.

구원파의 설교를 들어보면 100번이면 100번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만 말한다. 그런데 성경에 있는 깨달음에 대한 엄청난 말씀들이 쏟아지고 있기에 그것을 설명함에 있어 불가불 '은혜를 깨달은 날(골 1:6)'을 말했는데, 갑자기 수많은 교단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비난이 쏟아진 것이다. 이단이라고 말이다. 말이 되는가?

 

누군가가 이런 식으로 구원파를 이단으로 몰아세워 그곳에 있는 수많은 믿음을 가진 자들을 이 사회에서 손가락질당하고 직장에서 견딜 수 없는 눈초리에 결국 스스로 그만두게 만들고,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이런 식의 매장 행태를 양심의 거리낌 없이 만들어 나가는 상황을 판단할 능력조차 없는 것인가? 하나님 앞에서 오직 목사님, 전도사님이 중간에 서있어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아멘'이면 끝인가. 이것 만큼은 정말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 아닌가.

 

성경에는 무수하게 깨달음에 대한 표현이 나온다. 

 

나는 절대로 깨달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깨달음에 대한 성경 구절이 너무 많아서 깨달음과 구원은 전혀 관계가 없고, 그렇게 말하는 자들은 하나 같이 이단이라고 나는 말 못 한다. 성경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마 13:19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눅 8:10
너희로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며 또 너를 보내는 자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화답하게 하려 함이 아니냐  잠 22: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마 15:16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막 7:14

 

 

 

깨달음에 대한 표현이 너무 많아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런데 '주의 은혜를 깨달은 날'을 말했다고 40년 넘게 이 한국 땅에 이단 시비에 붙어놓아 온갖 조롱과 비난받은 구원파의 현실에 대해 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https://wpalss.tistory.com/1430

 

유혁기와 구원파에 대한 오해

'구원파'라는 이름. 이 프레임이 만들어 내는 사실의 왜곡은 얼마나 그 힘이 강한가. 어느 누가 감히 '우리에게만 구원이 있다'라는 주장을 하는가. 성령이 두려워서라도 그 소리를 하지 못한다.

wpalss.tistory.com

 

 

아무리 뜯어봐도 이단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속으로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직의 논리에 따라, 목사님의 논리에 따라 이런저런 말을 복잡하게 갖다 붙여 설명하는 것에 안도하고 있다면 이 한 마디를 해볼까 한다.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고린도후서 11:3

so your minds should be corrupted from the simplicity that is in Christ  Corinthians 11:3

 

 

 

진리란 복잡한 곳에 있지 않다.

언제나 쉽고 소박하고, 평범한(simplicity) 가운데 있다. 성경을 알기를 복잡하게 가르치려 하는 자가 주변에 있다면 그 자를 의심할 줄 알아야 한다. 

 

이 글에서 구원파를 대변하는 이유는 인터넷상에 깔려 있는 구원파에 대한 지적이 너무나 허접하고 수준 낮아서, 더 나아가서는 안쓰러워서 하는 것이다.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지만, 그 말씀을 깨닫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예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을 무시하고 구원파를 이단으로 몰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 그 완악한 마음을 품으라. 다만 이 한 말씀을 기억하고 그렇게 하길 바란다.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요 12:40 

 

 

 

구원받은 날짜?

구원파는 어디서도 구원받은 날짜를 주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하필이면 성경에 단번에 주신 믿음(유 1:3)과 은혜를 깨달은 날(골 1:6)이 있고, 바울 사도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빛을 보고 이후 나타난 회심한 때가 있고, 기독교인들이라면 끔뻑 죽을 칼 바르트가 말하는 '십자가 이전과 이후'라는, 명확한 빛과 어두움의 경계와 같은, 나눔이 있기 때문에 구원받은 날짜의 개념이 나온 것이다. 이것까지 절대 이단시하면 안 된다는 것은 쉽게 이해될 것이다. 날짜를 중시한 게 아니라 '이전과 이후'의 나뉨에 대한 표현이 날짜와 같은 시간 개념으로 나온 것이라는 말이다. (답답해 죽을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랴.)

 

바울 사도 흉상

https://wpalss.tistory.com/1442

 

마르틴 루터, 갈라디아서 주석을 읽고

지금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거룩한 자부심을 갖고 담대히 다음과 같이 말하며 율법에 대해 승리를 만끽할 수 있다. "그래 나는 죄인이다. 율법아, 네가 나를 반대하여 할 수 있으면 무엇이든

wpalss.tistory.com

 

 

누구도 회개하지 말라 하지 않았으며, 구원받은 이후 죄를 지으면 회개하고 자백해야 한다는 말씀을 좇고 있고, 누구도 기도를 폐하지 아니했으며 기도가 중요하다고 말했고, 그 어떤 누구도 구원 이후 죄를 지어도 된다고 하지 않았다. 믿음을 무시하고 깨달음만을 중시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성경을 가까이하는 자들이라면 지금의 이 글이 충분히 이해되고도 남을 것이라 믿는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내 양심에 해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한복음 1:5 

 

And the light shines in the darkness, and the darkness did not comprehend it. John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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