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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악을 사고할 능력이 사라진 무관심의 결과물…'예루살렘의 아이히만'

by 하 루 살 이 2015.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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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의 부제로 이렇게 달고 싶다.  ‘우리 각자 안의 아이히만'



악이란 무엇인가. 우리 사회가 맞닥뜨린 살인자들을 우리는 ‘악인’이라고 말한다. 물론이다. 그들을 선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들의 심리상태, 뇌 상태를 보면서 일부 살인자에 대해 사이코패스 정신병을 붙여준다. 사이코패스 증상은 우리가 흔히 아는 정신병자에게서 나타나는 것과 다르다. 그들은 ‘모든 이성적 판단을 하는 정신병자’라는 점에서 충격을 가져다 준다. 아주 친절하신 옆집 아저씨의 지하 냉동실에 시체들이 들어있고, 사회 봉사를 다니시는 앞집의 의사 선생님의 취미는 ‘약혼녀 살인’이라니.

 

악이란 분명하다. 평범하게 생각해서 ‘아주 특이한’ 것이다. 도덕적이지 않다.정의와도 배치된다. 이 단어가 주는 추상성 때문에 무엇이 악이라고 명확히 말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렇게 악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우리는 그들을 특별 취급한다. 일종의 정신병으로까지 설명하며 우리와는 다른 인간이라는 점을 말한다. 단 한 순간도 같은 인간으로 취급하기 싫은 것은 분명 사실이다. 내가 어떻게 그런 죄를 저지르겠느냐. 맞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이미 읽을 가치가 있다. 


한나 아렌트는 바로 이 점에 집중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정신병자가 아니었다. 우리와 똑같은, 심지어 우리보다 정신적으로 더 건강한 이성적인 인간이다. 예루살렘 법정에 있었던 모든 이들은 유태인 대량학살에 중간 책임자로 있었던 아이히만을 정신병자, 심지어 괴물로 취급하고 싶었지만 그는 평범하고 정상적이며, 우리와 같은 일반인이었음에 놀라했다. 그와 대화한 정신과 의사들은 이런 점에 특히 경악했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을 말하고 있다. ‘악’은 평범성이라는 성격을 가졌다는 점, 악이 특이하고 특별한 것이 아니라 ‘평범’하다는 것이다. 사회 안에서, 이 땅 위에서 악은 평.범.하게 깔려있다는 이 악의 성격은 선이 가진 것보다 강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선이 더 특이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3제국을 꿈꾸었던 히틀러와 그 치하의 복종한 자들이 저지른 극악 무도한 범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독일인들은 지금까지도 이성적이고 지적이며 지극히 '적상적'인 민족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때도 다르지 않았다. 그보다 훨씬 이전의 역사를 봐도 그들에게는 교황을 반대하며 일어난 루터의 종교혁명이 있었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쓴 괴테가 있었다. 많은 예술인이 그들에게서 나왔고 베토벤, 바흐, 모차르트 등 위대한 음악가들도 독일인이 많다. 철학의 최정점에 서 있는 순수이성비판의 칸트는 어떤가. 




그런 민족이 아무런 가책도 없이, 심지어 의무감을 가지고 유태인을 아우슈비츠로 보내 몰살하려한 건 우리의 이성적인 판단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당시 그들은 유태인 학살에 철학과 이성적인 판단을, 재산 몰수에는 법적인 방법을 강구하고 접근했다. 그들의 악이 더 무서운 이유이다.


 

"나아가 이 문제를 다루는 모든 문서들은 엄격한 ‘언어규칙’을 따랐다. 

'제거’ '박멸' 또는 '학살'과 같은 명백한 의미의 단어들이 쓰여 있는 보고서를 발견하기는 거의 드문 일이다. 

학살을 처방하는 암호는 '최종 해결책' '소개'와 '특별취급' 등이었다. 

이송에는 '재정착'과 '동부지역 노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법률 전문가들은 희생자들이 무국적 상태가 되도록 필요한 법적 조치들을 강구했는데, 

이 일은 두가지 점에서 중요했다. 

즉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나라도 그들의 운명에 대해 문제 삼지 못하게 되고, 

또 그들이 머무르고 있는 국가에서 

그들의 재산을 몰수할 수 있었다."



 

아이히만은 1960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이스라엘의 모사드에 의해 잡힌다. 그 잡히는 과정도 드라마틱하다. 그를 예루살렘 법정에 세우고 ‘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앞세우면서 100회가 넘는 공판 끝에 교수형에 처한다. 간단하지만 이 과정을 다룬 책이 바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아이히만의 주장을 설득력이 있다.

 

"아이히만은 신 앞에서는 유죄라고 느끼지만 법 앞에서는 아니다"고 이 질문에 답했다. 






"피고 측이 피고로 하여금 무죄 주장을 하게 한 이유는 

피고가 당시 존재하던 나치 법률 체계 하에서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고, 

그가 기소당한 내용은 범죄가 아니라 ‘국가적 공식 행위’이므로 

여기에 대해서는 어떤 다른 나라도 재판권을 행사 할 수 없으며, 

복종을 하는 것이 그의 의무였고, 

세르바티우스의 표현에 따르자면, 


그는 “이기면 훈장을 받고 패배하면 교수대에 처해질” 행위들을 했을 뿐이라는 것 등이었다."

 


또한 그가 말한 것에는 이런 주장도 있다.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상태에서 그 명령에 따라 행동한 나의 행위에는 살인에 대한 고의와 책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나를 기소한 검사와, 앞에 앉은 예루살렘 법정의 판사들, 이 모든 것을 보고 듣는 방청객까지 나에게 손가락질 할 수 없는 이유는 당신들이 당시의 나 아이히만이었다면 그렇게 행동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런 그의 주장을, 심지어 승자의 재판정에 선 당당한 피고인의 주장은 모든 이들을 당혹케 했다. 심지어 이런 주장에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않고 애매모호한 판결문으로 교수형에 처하면 모든 인류는 앞으로도 계속 아이히만의 주장에 찝찝함을 가지게 될게 뻔한 상황이었다.


또한 문제는 그만이 아니었다. 그는 이스라엘 법정에 선 순간부터 교수형에 처할 ‘죄인’이었다. 인류가 형법 안에 공통으로 가져온 ‘무죄 추정의 원칙’은 철저하게 무시된 상황, ‘소급입법의 금지-처벌은 법이 제정된 이후의 범죄에 대해서만 할 수 있다는 원리’까지 깡그리 무시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 자를 교수형에 처할 수 있을까. 거기에 앉았던 판사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고민 했다.



 

예루살렘 법원의 판결은 이 책의 마지막에 나온다. 하지만 그 판결을 분석하고 히틀러의 인류에 대한 범죄에 대한 철학적 사고를 예루살렘과 아이히만은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다. 한마디로 아이히만 그가 왜 사형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사고가 아주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들게, 너무나 정교하면서 논리적으로 쓰여져 있다.

 

 

“우리가 현재 고민하고 있는 범죄의 경우처럼 엄청나고 복잡한 경우, 즉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차원에서 그리고 다양한 행동방식(그들의 다양한 지위에 따라 입안자, 기획자, 실행자)으로 참여한 경우 범죄를 저지르도록 자문하고 유혹했다는 일상적인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러한 범죄들이 희생자의 수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범죄에 개입한 사람들의 숫자의 측면에서도 집단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수많은 범죄자들 가운데 희생자들을 실제로 죽인 것에서 얼마나 가까이 또는 멀리 있었던가 하는 것은, 그의 책임의 기준과 관련된 한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와 반대로, 일반적으로 살상도구를 자신의 손으로 사용한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책임의 정도는 증가한다” 

342쪽


 

한마디로 직접 가스실로 인도한 돌격대보다 멀리서 지시하는 입장에 서 있으면 있을수록 책임이 더 하다는 것. 특히 이런 범죄에 대해서는 인류가 이전부터 다루어온 범죄와는 다르기 때문에 그 접근 방법과 사고 방식은 달라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법원은 인류에 대한 범죄에 대한 개념도 그에게 제시하며 마무리했다. 이 과정은 분명 짧지 않았다. 1961년 12월 15일 금요일 아침 9시에 아이히만의 사형이 선고된다. 그는 항소했고 다음 해 1962년 5월 31일, 목요일, 자정이 되기 직전 아이히만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아이히만은 예루살렘 법정의 사형 판결이 있던 날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괴물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만들어졌을 뿐이다.” “나는 오류의 희생자이다”라고 아이히만은 말했다. 그는 ‘희생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세르바티우스(그의 변호자)가 한 말을 확인해주었다. 그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의 행위를 대신해서 고통받아야 한다는 그의 깊은 확신’이었다.” 

342쪽


 

히틀러가 명령 내린 대량학살은 안락사의 정당성이 독일 내에 뿌리깊게 내려지기 시작하면서 인정받았고 그의 학살 계획은 (처음에) ‘유전적으로 손상을 입은’ 독일인들을 제거함으로써 (유태인의 대량학살로) 마무리하려고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라고(392쪽) 한나 아렌트는 말하고 있다. 틀림없는 대량학살을 지시한 히틀러와 복종자들은 범죄자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들도 피해자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 복잡한 논리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그럼 정말 잘했네요’ 라며 박수를 쳐주며 예루살렘 거리에서 퍼레이드를 할 수 없다는 점을 한나 아렌트는 잘 알고 있다. 한나 아렌트의 무겁고도 복잡한 심경이 이 책에 있는 이유일 것이다.




결국 그녀는 악의 평범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악이란 바로 평범하다는 것. 너무나 평범해서 모두가 따랐고 그것을 악이라고는 쉽게 판단하지 못한 점을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녀가 말하는 ‘우리 각자의 안의 아이히만(390쪽)’은 이 책을 더 무겁게 해 준다. 나에게는 이 단어가 깊게 뿌리내려 충격을 주고 있다. 나도 이런 악을 저지를 수 있다는 가능성은 바로 이 뿌리 깊게 내린 충격으로 나타난다.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 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을(banality of evil)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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