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날이 있었습니다.
21살.. 21살의 모습이 기억납니다.
저는 캐나다 밴쿠버의 한 작은 마을에 있었습니다. 돌아다니다 지루해진 틈을 타 풀 밭에 누웠습니다. 생각의 꼬리들이 끊어질 때 잠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잤을까. 눈을 뜨자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이 보였습니다. 시야엔 오직 하늘만 있었습니다. 그 기억.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저를 붙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너무나 서툴고 원 없이 부족하기만 한 나이에 행복의 무언가를 보고야 말았으니. 직장 생활에 지쳐버린 지금 저에게 그 기억은 비현실적이기만 합니다. 사라져버린 옛 추억이라도 되는 것마냥 비쳐집니다.
최혜진 작가의 책 '그때는 누구나 서툰여행'도 비슷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작가는 잡지 에디터를 10년 간 해온 전형적인 글쟁이였고, 누가 뭐래도 월급쟁이였습니다. 일해서 돈 받고 자기 생활을 영위해나가는 일반인이었으며, 다시 돌아오는 월요일이 지긋지긋해도 어쩔 수 없이 숙명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직장인이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10년의 생활을 버립니다. 유럽으로 가는 것입니다. 서툰 여행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리고 작가는 이렇게 씁니다.
"생각의 챗바퀴를 멈추고"
저에게도 최근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직장 선배가 일을 그만 두면서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남기고 떠났습니다.
"숨이 넘어갈 때까지 일을 해야 일한 것처럼 인정받고,
저 아이는 자기 삶만 챙기는 아이라는 인식이 타인들에게 박히면
일 못하는 사람으로 취급받는 이 직장생활에서
나는 정말 행복한가를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일하지 않아도 일의 성과는 비슷할 것이고, 일의 결과는 같을텐데.."
"나는 행복하고 싶다. 그래서 떠난다."
그 선배가 퇴사하고 난 뒤, 잠깐 저에게서 받을 게 있다며 회사 근처 온 적이 있습니다. 회사 앞에서 그 선배가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커피 한 잔 사주고 싶어 카페로 갔습니다. 커피를 시키고 잠시 대기하는 그 짧은 시간에 갑자기 회사 상사가 그 카페로 들어왔고 무섭게 저를 노려보며 말했습니다. "너 일 안 하고 여기서 뭐해!" 그때 저와 퇴사한 선배 사이의 분위기는 모든 게 얼어버린 듯 했고, 저희는 커피가 나오자마자 일어나야 했습니다. 밖으로 나오자 너무나 추웠습니다. 우리는 이 상황이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었고 그 마음으로 눈인사를 마치고 헤어졌습니다.
서툰여행을 쓴 최혜진 작가도 그랬습니다. 10년의 직장생활. 만약 제가 이 작가와 잠시 커피 한 잔을 마실 기회가 온다 해도 그 10년의 직장생활기를 들을 이유는 없겠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그 10년의 삶이 어떠했을지 알 수 있는 것이니까요. 너무나 슬프고 힘든 시간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할 말은 그런 이야기가 아닐 겁니다. 그 시간을 교훈 삼고 거름 삼아 다시 그런 시간을 보내지 말 것을. 혹시라도 그 시간 안에 갇혀버린 채 저도 똑같이 후배가 가진 그 헤어짐의 순간에 찬 물을 끼얹는 사람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이런 것들을 이야기해야 할 수 있겠죠.
저는 작가가 너무나 부러웠습니다.
나도 저렇게 모든 걸 털어내고 어디론가 갈 수 있을까.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을 다시 가질 수 있을까.
누군가와 헤어지는 그 순간을 아파하며
사람의 소중함을 마음속 가득히 가질 수 있을까.
나는 다시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잠들 수 있을까.
행복할 수 있을까.
그저 말 없이 따뜻한 햇살 아래 앉고 싶어집니다.
다시 봄기운을 맞이하고 싶어집니다. 이런 책을 읽고 있으면 제 삶이 너무나 답답해보입니다. 서로의 이해를 과감히 무시하고 거절하는 이 사회를 떠나고 싶습니다.
다시 서툴고 부족하던 그 21살의 저에게로 돌아가고 싶어집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것에도 의무를 가지지 않는, 그저 나로서 존재하는 시간 안에서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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