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by 하 루 살 이 2017. 2. 27.
반응형

소설 한 권을 정독했다. 오랜만이다. 특히 이 책을 사놓고 2년이나 읽지 않고 책장에 꽂아놨다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이제사 다 읽어 숙제 하나를 끝낸 기분이 들었다. 당시에는 소설 내용이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아 중간에 포기했던 터였다. 소설 등장 인물이 이렇게 많아서야 되겠나.. 결국 읽는 이에게 한쪽에 노트를 펴놓고 인물이 나올 때마다 그 이름과 직업을 적어놓고 읽어야 하니.. 이렇게 불편한 소설이 있나 싶어 중간에 덮어버렸다. 


그런 소설이었다. '카타리나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그런데 말 그대로 우연히 읽을 책이 없었고, 두꺼운 책은 읽기 귀찮다 싶어, 한번 이 책을 다시 읽어나 볼까 싶어 꺼내들었다. 과거 그렇게 안 읽히던 책이었는데. 놀랍게도 단숨에 읽어 들어갈 수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몰랐다. 방 안 불을 켜지 않아 주변이 캄캄해 진 줄도 모르고 읽었다. 이 이야기가 실화를 바탕으로 썼다고 하니 놀랄 일이었다. 책이 나를 감싸는 기분. 맛있다는 기분인데, 책에서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이 소설을 지금까지 무시하고 덮어왔다니. 2년 전에는 그만큼 내가 이 책을 읽을 준비가 안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은 자유로이 꾸며 낸 것이다. 저널리즘의 실제 묘사 중에 <빌트>지와의 유사점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의도한 바도, 우연의 산물도 아닌, 그저 불가피한 일일뿐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하인리히 뵐은 이 소설의 첫 대목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썼다. 이 소설이 한 언론사와 관계없음을 말하면서 소송을 피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이 소설은 한 여자의 명예를 완전히 더럽힌 그 한 언론사를 향해 날카로운 칼끝을 겨누고 있다는 걸 명확히 말했다. 


나는 이 대목을 읽고 실소를 머금었다. 이 소설을 읽고 움찔했을 그 언론사 임원 얼굴이 상상이 됐기 때문이다. 역시 소설가는 다르구나..라는 생각에 통쾌함마저 느꼈다. 또 한편,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며 심각해졌던 이유는 바로 이 소설 내용이 만만한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내용이 칼날을 겨누고 있는 대상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기자였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 언론사에서 일하는 기자였기에 나는 심각해져갔다.  


우리가 왜 소설을 읽는가. 내가 가장 존경했던 이가 한 말이 기억난다. "소설을 읽어라." 인간이길 포기한 흉악범죄를 저지를 사람도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왜 그런 흉악범을 가지게 되었나를 소설가는 말할 수 있다. 기자는 기사로 그렇게 쓸 수 있을까? 좀 어렵다. 매일 기사를 쏟아내는 기자에겐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유는 명확하고 간단하다. 그 빌어먹을 '팩트' 때문이다. 


팩트가 왜 문제냐고 하겠지만 내가 경험해본 결과, 굳이 기자로서 경험하지 않아도 알만한 경험으로 비추어보면(왜냐하면 우리 모두 기사를 보고 살기 때문에) 기자가 말하는 팩트는 '사실'과 거리가 멀고 '현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 '현상'을 얼마나 정확하게 보여주느냐를 따지는 척도가 기자가 말하는 팩트다. 


예를 들어 A라는 정치인이 그와 관련된 회사 내부 정보를 입수해 지인과 회사 주식을 억대로 매입해 일주일 후 되팔아 시세차익을 얻었다고 하자. 그가 이 혐의로 검찰에 들어갔다고 하자. 팩트는 여기에서 끝난다. 기자라면 여기에 덧붙여 그 회사 입장을 전달하며, <회사 관계자는 "아직 검찰 조사 중이다. 혐의가 입증되면 그때 가서 회사 입장을 밝힐 것"이라고 말했다>, 이 내용을 뒤에 적을 것이다. 


기자가 말하는 수준의 팩트는 이 정도다. 그런데, 만약 A가 무혐의로 풀려났을 때 문제는 심각해진다. 그 사람이 유명 정치인이었기 때문에 모든 매체 기자가 1면 톱으로 이 내용을 쓰고 난리를 쳤을 경우, 검찰의 무혐의 판결이 이 정치인에게 과연 얼마나 다행스러운 결정이 될까. 이 정치인 정치생명은 이미 끝난 뒤다. 무혐의든 아니든 아무 상관이 없다. 기자는 다음 기사를 어떻게 쓸까? 간단하다. 팩트만 전달하면 된다.


"A의원 혐의 벗다"


이 이상, 이 이하도 기자는 다루지 않는다. 매일 기사를 써야 하는데 그 중요하고 지고지순한 '팩트' 이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나. 기자의 일은 팩트 전달이지 내막 전달과는 관계없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부제가 더 중요해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


팩트 전달이 가끔 무섭다. 진실과 팩트는 거리가 멀다. 한 사람 인생을 송두리째 망칠 수 있는 게 팩트의 힘이다. 팩트 이면을 보지 않는 그 힘은 오해를 불러오고 그 오해를 증폭시킨다. 

 

하인리히 뵐


카타리나 블룸도 그렇다. 그녀는 괴텐과 파티에서 만나 첫눈에 호감을 느끼고 하룻밤을 보낸다. 그리고 사랑을 하게 된다. 하루 만에? 사랑은 가능하다. '사랑은 불가능에 대한 사랑'이라고 김훈도 말하지 않았는가. 블룸이 괴텐이 은행 강도고 살인자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도 경찰로부터 도망갈 수 있게 도와줬다. 그건 범죄다. 이 소설은 그 범죄라는 팩트가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팩트는 맞는데 대체 왜 그랬을까를 팩트를 말하는 기자들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빌트>지와의 유사점이 있다고 해도'라고 초반에 쓴 것이다. 


카타리나 블룸은 범죄를 저질렀지만 기자들이 달라붙어 한 행동은 병원에 있는 그의 어머니를 찾아가 딸 이야기를 캐물어 결국 그 어머니 죽음을 유발하고, 블룸을 아끼는 고용주 변호사를 찾아 휴가를 망치고, 그 변호사가 "블룸은 내가 아는 한 이성적인 여자다"라는 말을 기사에다 "블룸은 내가 아는 한 계산적인 여자다"라고 쓰고, 다른 고용주가 "블룸이 과격하다면 과격하리만큼 정직하다고 해야 한다"라고 말한 것을 "블름은 과격하다"로 잘라서 기사에 쓴 그 기자 모습을 하인리히 뵐은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소설에서 언급된 기자들이 카타리나 블룸이 그 살인한 자를 숨겨주고 도망가게 해줬다고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말살시키고, 선량한 변호사가 더 이상 변호 일을 못하게 하고, 그녀의 어머니를 죽게 만들고, 결국 그녀가 그 기자를 만나 권총을 들게 만들었던 일련의 모든 과정을 기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라도 된다면 정말 대단한 일이다. 


이 소설은 그래서 읽을 가치가 있다. 실제 일어난 일을 썼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전히 뵐이 말하는 폭력이 계속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기사를 펼쳐서 보자. 이 사회를 얼마나 어지럽게 만드는 팩트에 충실한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블로그 인기글

2017/03/04 - [나의 이스라엘] - 이스라엘 텔아비브 항구에서

2017/03/03 - [나의 이스라엘] - 예루살렘 통곡의 벽에서

2017/03/01 - [독서] - 강원국 '대통령의 글쓰기'…'朴'에게 없는 대통령 자질론

2017/02/27 - [독서] -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2017/02/27 - [나의 이스라엘] - 이스라엘을 쓰기로 결정하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