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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20대에 읽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by 하 루 살 이 2016.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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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일본 여행을 다녀온 지인이 소설 '설국'을 아느냐고 물었다. '설국'이 말하는 지방에 다녀왔다며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 펼쳐진 광경을 보고 감탄했다고 말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언젠가 나도 그런 곳에 가서 감탄하겠지'라고 생각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은 20대 나의 정신세계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소설이었다. 그만큼 지인이 전해준 여행 후기는 내 정신에 보이지 않는, 경험하지 못한 광경에 대한 그리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이 소설은 사라질 것들에 대한 애처로움을 잘 표현하고 있다. 사랑과 허무함, 인생이란 주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20대 초반의 나는 주인공 시마무라의 여행을 마치 나의 여행인 듯, 그가 바라보는 눈 덮인 고장 저녁 풍경을 내가 보고 있는 듯 느끼며 삶에 대해 이야기기하는 '설국' 읽기를 되도록 차분하게 진행했다. 


사랑에 대해선 방관자요, 헤어짐과 죽음에 대해 고심했던 주인공 시마무라. 그에 대해 나는 당시 그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음에도 이해하고 있었고, 더욱이 동질적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평소에 한 말에서 "최고의 문학은 불경이다"라고 말한 만큼 그의 소설에서는 지나간 것들에 대한 애처로움과 무상적 상념이 짙게 나타났다. 그리고 누구나 한번쯤 철학자가 된다는 말처럼 나도 그의 생각과 정신에 벗어나지 못한 채 천천히 걸으며 지나간 시간에 대한, 헤어진 이들에 대한 아쉬움을 떠올리기도 했다. 


봄의 화사함, 여름의 강렬함, 가을의 죽음, 겨울의 아름다움. 이 반복되는 현상은 인생에게 간절함에 대한 무상함을 전해준다. 서양의 문명이 아직 닿지 않은 고장에서 주인공이 한 일도 곧 사라질 일본의 전통 문명과, 거기에 기거하는 두 여인이 전달하는 사랑에 대한 사라짐, 그리고 어딘가에서 다시 시작할 삶에 대해 최대한 멀리서 바라보며 그것들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사라질 것들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을 넘어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더욱이 아름답게 만들어 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당시 삶의 허무함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나는 이 한 문장이 설국의 모든 걸 말한다고 생각했다. 


"창문 철망에 오래도록 앉아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면 이미 죽은 채 가랑잎처럼 부서지는 나방도 있었다. 벽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도 있었다. 손에 쥐고서, 어째서 이토록 아름다운가 하고 시마무라는 생각했다."


내 20대 젊은 시절은 삶과 죽음, 이 두 가지를 가장 많이 고민했다. 하지만 30대의 나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선택의 기로 앞에서 옳고 빠른 가치판단을 내려야 한다.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결과에 충실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할 나위 없는 나이가 된 것이다.


어느 것이 옳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가끔은, 보이지 않는 것을 동경하며 책을 읽던 그 시간들은 분명 '좋았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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