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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후기

by 하 루 살 이 2018.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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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9년 만일 것이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다시 봐야겠다 여러번 생각한 끝에 9년이 지나버렸다.

기대도 있었다. 그렇게 미룬 만큼 세월도 흘렀고, 나도 많은 일을 겪었으니 보고자한 영화에서 오는 기분은 또 다르겠지.

그때 나는 24살이었다.
이 영화를 보고 알 수 없는 강한 인상을 받았고, 인생이란 생각만큼 쉽지 않겠구나 혹은 그 인생이란 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 줄 아름다운 회전목마는 결코 아니겠구나를 생각했던 것 같다.

여하튼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다. 그 인생이란 것도 처음부터 내가 원해서 시작한 것이 아니니 날 때부터 꼬여먹은 것이었다. 그러니 태어난 아기는 첫 만남부터 그렇게 울부짖는 것이겠지.

안 되는 것을, 이미 지나가버린 것을 고집스럽게 어떻게든 해보려는 것. 좋다. 하지만 한번쯤 이제는 받아들이는 것도 정신건강에 좋지 않을까. 내 맘대로 안 되는 세상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9년 전, 어찌된 영문인지 영화를 보고도 이 영화 제목의 의도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은 그래도 조금은 '그래서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정해진 규칙과 룰이 없는 사회에서 살 만큼 살고 느끼는 것이란 것도 이렇게 별거 없었다. 그래서 그런가? 고작 이정도이다.
그리고 사라져간 사람들에 대한 쥐꼬리만도 없던 이해의 시작. 남들도 나에게 그럴 것이고 그것은 죽어서나 가능한 일이니 이 얼마나 무자비한가. 그저 웃고 말지.

그런데 지난 밤 꾼 꿈은 더욱 불가사의하고. 그렇지만 아예 그 뜻을 모를 바도 아니다. 다 나와 남의 관계에서 오는 것들이니 말이다.

이런 것을 아는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 그들의 이 깊은 심정을 알아줄 나라라는 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고,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며, 존재한들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란 분명하고 획실하다. 세금에 미친 것이 바로 나라라는 것이니까.

가장 존경해 마지않던 이의 갑작스런 죽음. 그 죽음이 이렇게나 미스테리할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타살의 흔적이 곳곳에 있어 기자의 정신을 발휘해 찾아다녔건만 나온 거라곤 시체 발견자의 나라를 향한 불평불만과 타살에 대한 그의 확신 뿐.

누가 우리 부모의 피와 땀으로 이룬 인생 말년의 결실을 사돈이 털어 먹을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나. 거기까지라면 웃고 넘어가려 했는데 일을 저지른 사람의 되려 피눈물 흘리는 자들을 향한 비웃음이라니.. 나는 광화문에서 피자를 시켜먹은 덩치 좋은 인간들을 언젠가 발라먹을 준비를 하고 있다. 분노를 거기에라도 쏟아야 살 것 같은 빌어먹을 인생이 시작되었다. 확실한 건 이 모두 인간이길 포기한 자들이다.

그런데..
결국 세월이 많이 지나 분노에 찼던 시간이 나를 지치게 할라칠 때쯤 다시 이 영화를 볼 기회가 올지 모르나... 그때쯤이면 피해를 준 이들도 그에 응당한 대가를 받을 것이고 더 중요한 건 그 대가에 대해 피해자들은 여진히 전혀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100%고, 그래도 그들은 절대 반성하지 않을 인간이라는 것.

나는 여전히 어젯밤 꾼 꿈으로 심난한 아침을 맞을 것이고 그 꿈을 돌이켜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너무나 나약한 인간일 것이다. 오직 신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에 다시 집중하러 탕자처럼 먼지를 털고 일어날 뿐이다. 우리는 너무 멋대로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 영화는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훌륭한 영화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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