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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으로 말하다]② 바울과 바나바에 관하여

by 하 루 살 이 2018.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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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으로 말하다]② 바울과 바나바의 관계에 관하여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 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사도 15:37~41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서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일이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다. 그 다툼의 원인은 마가라 하는 요한을 바울의 2차 전도여행에 동행케 할 것이냐를 두고 일어났다. 영어로 보면 다음과 같다. 


"Now Barnabas was determined to take with them John called Mark. But Paul insisted that they should not take with them the one who had departed from them in Pamphylia, and had not gone with them to the work. Then the contention became so sharp that they parted from on one another. And so Barnabas took Mark and sailed ro Cyprus: but Paul choed Silas and departed, being commended by brethren to the grace of God. And he went through Syria and Cilicia, strengthening the churches." Acts 15:37~41



한글 성경에는 마가를 데려가는 것이 '옳지 않은 일'로 되어 있으나 영어 성경에는 좀 더 확실하게 '절대 데려갈 수 없다'로 표현돼 있다. 밤빌리아에서 우리를 떠난 마가, 우리와 함께 사역을 마치지 않은 자를 데려가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다'는 식으로 강하게 표현돼 있다. 


이별의 장면도 더욱 정나라한 표현으로 되어 있다. 한국어 성경에는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섰다'라고 되어 있다. 영어는 좀 다르다. 'the contention became so sharp'. 그 논쟁이 심히 날카로웠다는 것이다. 


논쟁 혹은 언쟁 contention 이라 함은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각각 자기 주장을 논하여 다투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마가를 데리고 가느냐 마느냐를 두고 매우 날카로운 언쟁이 있었다면 바나바의 주장도 만만치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사도행전에는 그러한 논쟁의 내용을 거의 축소시켰고 상세한 설명을 편제했다. 오직 바울의 주장만 짤막하게 서술하는데 지면을 허용했을 뿐이다. '밤빌리아에서 한 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려가는 것은 옳지 않다'는 바울의 기준만이 성경에 기록됐을 뿐 바나바가 어떤 이유를 댔는지 우린 성경만으로는 알기 힘들다. 하지만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분명 '심한 논쟁'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런 것 때문에 바나바가 자기 혈족을 생각해 조카인 마가를 챙겼다는 추측이 난무하는 것이다. 



바울이 루스드라(위 두 그림 속 배경 도시)에서 앉은뱅이를 낮게 하매 무리가 이 이적을 보고 바나바를 쓰스(제우스)라 하고 바울을 허메라고 부르며 그들을 위해 소와 화관으로 제사하려는 것을 말린 사건이 있다. 그리고 그곳까지 온 유대인들이 무리를 초인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친 사건도 루스드라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바나바는 우리가 생각하는 정도의 수준 낮은 인간이 아니다. 성경적으로 지식이 탁월하며 신앙적으로 재물을 초월한 사람으로 보여진다. 바나바를 육신의 생각대로만 움직이는 사람으로 판단한다는 것이 오히려 어려운 상황이다. 


우선 성경에 따르면 그는 현재 키프로스라고 불리는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이이다. 이름은 요셉이다.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했다. 이 바나바는 번역하면 권위자라는 뜻이다. 왜 이런 별칭이라고 해야할까, 그에 대한 일컬음이 권위자라고 했는지에 대해선 사도행전에 자세히 나와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 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사도 11:22~26 중간



여기에서 볼 수 있는 바나바의 사람 됨은 결코 혈육에 흔들리기보다 믿음으로 생긴 신앙의 도를 전함에 있어서 무엇보다 이를 우선시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그는 바울을 찾아가 만나서 안디옥에 데리고 온 사람이다. 


바울이 큰 빛을 보고 소경이 되는 장면



사도행전 9장을 보면 바울이 큰 빛과 예수의 음성을 들은 뒤 변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이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한 자이기 때문에 그의 변화를 믿지 못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하지만 그때 나타난 사람도 바로 바나바였다.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라는 내용을 살펴보면 바나바는 결코 육신의 겉모양과 그의 위치를 따지기보다 그 사람의 행동과 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인지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특히 초대 교회에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 사건이 있기 바로 직전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바나바의 돈에 대한 성품이 어떠함을 잘 알 수 있다. 믿는 무리 중에 핍절한 자가 없도록 가진 자들이 자기의 밭과 집을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에게 가져오던 때였다. 바나바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도 밭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 




사도행전에는 중간까지는 바울보다 바나바의 이름이 앞선다. 그를 먼저 앞세웠던 것을 13장에 가서 바울의 이름이 먼저 거론되기 시작하고 그 뒤에 바울과 바나바와의 이별 뒤로 바나바는 사도행전에서 사라진다. 


바울이 바나바의 이름보다 앞서게 된 사건은 바로 바보에서의 전도 이후부터다(사도행전 13장). 이때부터 사울이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바울이라는 이름이 사용된다. 바보에 이르기 전 살라미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 당시에 싸움의 발단이 된 요한(요한)이 바울과 바나바의 수종자로써 존재했다. 


살라미에서 바보로 이동한 그들은 그 지역의 총독 '서기오 바울'에게 전도를 시작했다. 당시 거짓 선지자 박수가 전도를 방해하는 것을 보고 바울이(이때부터 성경에서는 사울에서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변경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를 저주하며 얼마 동안 소경이 된다고 했고 즉시로 그가 소경이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총독 서기오 바울이 이를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겼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하부터 본격적으로 '바울'이라는 이름이 사용된다. 



바보에서 이들은 배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는데, 바로 이때 요한(마가)이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이다. 바울이 본격적으로 사울에서 이름이 변경되고, 바나바보다 이름이 성경에서 앞서는 그 시점에서 요한이 떠난 것이다. 


이후 바울은 버가를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서 엄청난 설교를 한다. 그 양만 구절로 따지면 13장 16절에서 41절까지 되며, 이스라엘 역사를 설명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예수를 힘입어 죄 사함을 전하는 것,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에 이르지 못하는 불신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를 정확하게 전달한다


이 설교 이후 '바나바와 바울'이 아니라 '바울과 바나바'가 된다. 


이후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앉은뱅이를 걷게 하는 이적도 행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그 전에는 바울로부터 표적과 이적이 나타났다는 내용을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루스드라 사람들이 이 앉은뱅이가 걷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제사를 하려고 할 때 바나바가 바울보다 먼저 이름이 거론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보에서부터 바울이 앞서다 잠시 바나바의 이름이 이 사건 중에 먼저 앞서고 이후 모든 것은 바울의 이름이 앞선다. 둘 사이의 위치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임에는 틀림없다. 


이로 보건데 바울과 바나바가 헤어지는 그 다툼은 결코 일반적인 다툼으로만 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나바의 논쟁의 논지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그도 분명 마가를 데려가야 한다는 데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단순히 혈육을 생각해 억지를 부릴 만큼 바나바가 수준 낮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 바울이 사울에서 이름이 바뀌는 시점, 엄청난 설교를 한 시점, 이적과 표적이 나타난 시점이 있었고 어떤 변화가 바울에게 있었던 시점에 마가가 그들을 떠난다는 건 확실하다. 그것이 신비적 변화일 수도 있다.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전도의 왕성한 움직임과 명확히 하나님께서 바울을 쓰시기 시작하는 모습이 나타난 시점이라는 건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이후 바울은 마가를 자기의 전도 사역에 함께 하는 동역자로서 인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마가에 대한 형제로서의 용서를 하게 된 것으로 충분히 유추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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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빌레몬서 1:24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골로새서 4:10


"누구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디모데후 4:11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은 결코 쉽게 생각할 수 없는 다툼이다. 인간들끼리 자기 소욕에 따라 다투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그러면서도 마가가 다시 바울의 동역자로서 인정된 점에 대해서도 우리는 신중하게 생각할 것이 많아진다. 빌레몬서와 골로새서는 바울이 마지막 여정인 로마에 갇혔을 때 쓴 옥중서신이다. 이미 바나바와 헤어진지 오랜 시간이 지났을 때다. 그때 바울은 마가를 가리켜 나의 동역자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그를 소개하기를 '바나바의 생질'이라고 했다. 바나바를 인간적으로 함께 동역한 한 사람으로서 그를 기억한 것이 아닌가 싶다. 바울만큼 복음만 생각한 사람이 없지만 바울만큼 성도를 섬기는데 자기를 내어준 사람도 없다.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가 마가를 바라볼 때 당연히 함께 동역했던 바나바를 기억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다시 바울에게로 돌아온 마가를 받아주고 함께 사역할 수 있도록 한 것도 바울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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