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그네| 헤르타 뮐러
숨그네에는 실제 인물의 이야기라는 중압감이 있다.
헤르타 뮐러의 어머니는 10대 후반에 4년 동안 러시아 수용소에 갇혀 지냈고 자신의 동료 오스카도 마찬가지였다. 소설은 여기에서 쓰여지기 시작했다. 소설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폭력 앞에서 쓰러져 간 실제 인물들의 뒤섞임이다.
헤르타 뮐러는 동료 오스카의 강제추방에 대한 이야기를 받아쓰고 있었다. 하지만 동료의 죽음으로 잠시 중단된다. 혼자서 소설을 완성해야만 하는 뮐러는 그 순간 깊은 상실감에 빠진다. 이 일을 혼자 해내야 한다는 중압감은 고통이 되었다. 책임감 또한 배가 되었고 뮐러은 수면 아래 깊이 잠긴다. 이 상실감을 떨쳐 내기까지 1여 년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고심 끝에 결단을 내리게 된다. 소설을 쓰기로.
삶의 고통이 숨그네 소설 전반을 흐른다. 독자가 그녀의 고통을 남김없이 느껴야만 하는 이유다.
그 당시 내가 자란 마을 농부들의 강점은 덩치 큰 침묵이었다. 그들의 침묵은 응축성이 있으면서도 무던했다. 이런 종류의 침묵은 말과 말 사이의 침묵 같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완결된 무엇이다. 사람은 자기에 대해서가 아니면 말을 많이 하지 않게 된다. 침묵할수록 존재감은 커진다. 집 안의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말 대신 얼굴 주름이나 목의 힘줄, 콧방울의 움찔거림, 입가나 턱 혹은 손가락의 움직임을 읽는 법을 배웠다. 우리는 귀보다 눈으로 복종했다. 숨그네 p.336
헤르타 뮐러가 조국 루마니아 사람들에 대한 침묵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들이 겪어야만 했던 역사에 대한 침묵은 숨그네에 나오는 주인공의 독백으로 승화된다. 얼굴 주름, 목의 힘줄, 콧방울의 움찔거림들이 소설 속에 소주제로 부활하여 다양한 일상 물건들이 되었고 수용소에 들어간 주인공의 눈에 비친다.
숨그네에 주목할 점은 주인공이 살아서 돌아왔다는 사실이자 그 이후의 삶이다. 주인공이 고향에 돌아온 이후의 삶은 그토록 바라던 자유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직 공포와 불행의 연속이었다. 자유에서 오는 불행은 주인공을 지독하게 고독하게 만들고 주변으로부터의 억압이 된다. 외부에서 발생하는 강요된 침묵 이전에 처음부터 자유로웠던 사람들의 그 자유 속에서 그들은 침묵 했고, 나머지 삶 역시 타인들과 동떨어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울타리 안에 주인공은 여전히 갇혀 지낸다. 수용소는 그들 안에서 연속되고 있었다.
세월에 젊음을 약탈당한 내가 자기들과 어울리지 않음을 그들도 안다. 한때 나는 배고픔에 약탈당해 내 실크스카프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도 다시 살을 찌웠다. 그러나 세월에 약탈당한 살은 아무도 다시 만들어줄 수 없었다. 전에는 어떤 대가가 있으리라 믿었다. 밤에 여섯 번, 일곱 번, 여덟 번까지도 수용소로 강제추방 당하도록 나를 그냥 내버려둔 데 대해, 나는 천천히 늙어감으로써 약탈당한 오 년을 돌려받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았다. 숨그네 p.325
숨그네를 통해 헤르타 뮐러는 침묵으로 일관하던 그들의 수용소 이후 삶까지 심연에서 끄집어 냈다. 또한 널린 자유를 만끽하는 우리를 강하게 꾸짖는다. 세상 어딘가에 이와 비슷하거나 더 심할지 모를 자유의 파괴가 있을거라는 불안감을 통해서다. 뮐러는 독자들에게 세상이 밝지만은 않다는 걸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뮐러가 소설의 주인공을 통해 마지막까지 희망을 함부로 말하려 들지 않은 이유다. 실제 인물들이 수용소 이후 침묵을 일관 했을 때, 그들이 당한 일에 무관심으로 대응한 우리의 자유는 폭력과도 같은 죄악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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