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 | 김훈 저
칼의 노래는 내 주변 여러 사람들이 권하는 책이었다. 김훈이라는 스타성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스타성 작가에게 기대심이 애초부터 없는 나였지만 이 책을 펼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김훈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나는 칼의 노래를 펼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훈’이라는 이름에서 오는 호기심이 내게는 있었다.
나는 네이버의 ‘지식인의 서재’를 즐겨 본다. 나부터가 큰 서재를 가지고 있다. 서재에서 맡을 수 있는 책 향을 좋아한다. 지식인의 서재에 김훈이 나왔고 나는 유심히 봤다. 많은 ‘지식인’들이 책에 대해서 말했지만 기억에 남는 말은 솔직히 없었다. 김훈의 말 외에는.
자꾸만 사람들이 책을 읽으라, 책을 읽으라 하잖아요. 그게 틀린 말은 아닌데…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근사록>이라는 책을 보면 ‘공자의 논어를 읽어서, 읽기 전과 읽은 후나 그 인간이 똑같다면 구태여 읽을 필요는 없다.’ 라는 이야기가 나와요. 다독이냐 정독이냐, 일 년에 몇 권을 읽느냐, 이런 것은 별 의미 없는 것이지요. 책을 읽는다는 것보다도 그 책을 어떻게 받아들여서 나 자신을 어떻게 개조시키느냐는 게 훨씬 더 중요한 문제죠.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 에피소드 13
그리고 나는 ‘저 사람의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칼의 노래는 어려운 책이었다. 더 집중해서 읽었다. 조용한 카페에서 칼의 노래를 딱 덮었을 때, 그때서야 나는 책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당항포와 고성 앞바다에서 자란 나는 어쩌면 남보다 더 깊게 그 바다들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읽는 내내 생각을 사로잡은 건, 이 인간이 누구냐 였다. 단순히 칼의 노래의 주인공은 이순신이라고 하기에는 그 뒤에 있는 김훈이 너무 강하다고 생각했다. 김훈은 이순신의 생각을 알기 위해 여러 자료를 검토하며 그를 파헤치고 책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 자신이 칼의 노래에 고스란히 담기게 됐다. 책에서 두 남자를 읽어야 했던 것이다.
칼을 갈았다. .. 시퍼런 칼은 차가운 쇠비린내를 풍겼다. .. 나는 칼을 코에 대고 쇠비린내를 몸 속 깊이 빨아넣었다
p.33
몸 안으로 밀어 넣으려는 울음소리고 몸 밖으로 밀려나오고 있었다. 그 여자는 전신으로 울고 있었다.
p.36
적에게 보여줄 아무런 군세도 없었다. 나는 늘 그쪽이 추웠고 시렸으며 적에게 감지 될 내 빈곤이 두려웠다.
p.217
칼의 노래는 냄새가 짙게 깔려있는 책이다. ‘비린내’라는 표현이 인상적이다. 칼에도, 안개에도, 바다에도, 여자에게도 이 비린내가 표현되어 있다. 깨끗한 현대인들은 이 감정을 쉽게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임진년 이후 7년의 폐허는 분명 비린내 나는 긴 시간이었다. 바다는 외군인지 조선군인지 모를 시체들이 휩쓸려가고 있고 평지에선 수많은 평민들이 무참히 죽어갔다. 끔찍했던 전쟁. 분명 조선 땅은 비린내로 풍기고 있었을 것이다. 책에 나오는 산 사람의 냄새도 눈길을 끈다. ‘내가 맡는 내 몸의 냄새는 고단했다’처럼 칼의 노래에는 냄새가 인상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코 끝으로 찡하게 들어오는 비린내처럼 사람에 대한 표현도 정교하다. 어떤 삶을 살아오고 어떤 정신을 가졌느냐에 따라 사람에게서 풍기는 냄새가 다 다르다는 걸 예리하게 나타냈다.
권률은 무섭게도 집중된 위엄을 가진 사내였다. .. 그는 무수한 아수라를 돌파한 자의 살기를 몸 속 깊이 숨기고 있었고 나는 나의 살기로 그의 살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p.32
칼을 받기 직전에 김옥천은 고개를 들었다. 상대를 밀쳐내는 눈동자였다. 젊은 사내의 거친 힘이 끼쳐왔다.
p.46
김수철은.. 예민하고 담대한 청년이었다. 문장이 반듯하고 행동이 민첩했다. 입이 무겁고 눈썰미가 매서웠으며 움직이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p.111
나는 이 책에 나오는 검명(檢銘)에 대한 부분을 인상깊게 읽었다. 이순신은 대장장이 몇이 만든 칼을 받기 전에 부하로부터 검명을 새기고 싶다는 말을 듣는다. 글을 내려달라는 부하에게 이순신은 검명은 필요 없다고 말한다. 칼에 문장 장식이란 불필요하다고 여겼던 그였다. 하지만 간절한 부탁에 이순신은 글을 내린다.
일휘소탕 혈염산하
一揮掃蕩 血染山河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
부하 김수철이 이 염(染)자를 보고 글자가 깊다고 말한다. 이순신은 적의 피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자기 검명을 보며 글이 긴 것을 마지막까지 후회한다. 차라리 다 지우고 염(染)자 하나만 남겼으면 하고 아쉬워한다. 훗날 이순신은 젊은 일본 무사 두 명의 칼에 적힌 검명을 보게 된다.
말은 비에 젖고,
청춘은 피에 젖는구나
이순신은 이 칼 주인이 스물 여섯이란 말을 듣고 ‘글이 칼을 닮았으니 필시 사나운 놈이었을 게다’라고 말한다. 다른 칼은 또 달랐다.
청춘의 날들은 흩어지고
널린 백골 위에 사쿠라의 꽃잎 날리네
이순신은 그 녹슨 검명들을 자세하게 들여다 봤다. 검명들을 보고 생각에 잠긴다. 시심(詩心)의 문장가였던 일본 무사들을 보고 두려움까지 느꼈다.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란 걸 알았다. 그의 젊은 적들은 그렇게 칼을 닮아 있었다. 한 단어가 이렇게 깊은 뜻을 가지고 있다는 걸 칼의 노래를 읽고서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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