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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십자군 전쟁과 유대인 대학살

by 하 루 살 이 2020.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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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에 발생한 십자군 전쟁을 말할 때 많은 역사학자들은 '실패한 전쟁' '명예롭지 못한 전쟁'이라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한 면만 보고 다른 면은 보지 못한 정의다. 나는 십자군 전쟁에 대해 알면 알아볼수록 끔찍한 유대인의 학살을 찾을 수 있다. 그 전쟁은 실패한 전쟁이 아니었다. 분명 성공한 전쟁이었다. 다시 말해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역사 속에, 만천하에 드러낸 전쟁이던 것이다. 살인의 정당성을 유럽인들이 획득한 전쟁이었다는 말이다. 몰상식한 인간들이 목소리를 내고 그들이 통치하는 세상이 허용되는 역사를 십자군 전쟁이 만들어낸 것이다. 다시 말해 악의 승리를 보여준 전쟁이었다. 

 

그 십자군 전쟁은 먼 미래, 2차 세계대전에서 결국 유대인 600여만 명 대학살을 만들어낸 전초전이었다. 즉 '유대인 대학살'을 성공시킨 전쟁이 십자군 전쟁이다. 

 

 

그렇기 때문에 버드런트 러셀도 '서양철학사'에서 십자군을 말할 때 바로 이 점부터 말한 것이다.

 

십자군 전쟁의 선동에 자극받아 종교적 열의가 커짐에 따라 교황의 권력도 커졌다. 또한 수많은 유대인이 학살되었다. 학살을 모면한 유대인은 재산을 빼앗기고, 강제로 세례를 받았다. 1차 십자군 소집 당시 독일의 수많은 유대인이 살해되었으며, 사자심왕 리처드의 즉위와 동시에 소집된 3차 십자군 당시 잉글랜드에서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최초로 그리스도교 황제가 통치한 요크는 유대인에 대한 가장 끔찍한 대규모 잔혹한 행위가 벌어진 무대였다. 십자군 이전 유대인은 유럽 전역에서 동양 물품의 무역을 거의 독점했다. 십자군 이후 유대인을 박해한 결과로 이러한 무역은 대부분 그리스도교도(기독교)가 장악했다.
러셀의 서양철학사 557p.

 

러셀의 서양철학사를 읽다 보면 인류의 지성사에 몇 줄기의 흐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큰 줄기는 기독교라는 줄기다.

 

 

이 거대한 줄기는 서양철학사뿐 아니라 유럽과 북아프리카, 터키와 이스라엘로 뻗어나가는 지중해 동쪽 라인을 형성한다. 그 힘의 작용은 모든 사람들의 인식 구조를 기독교적으로 바꾸었다. 그 틀에서 모든 것이 움직이도록 작용했다. 황제와 교황의 권력 다툼에서 언제나 황제는 쉽사리 흔들렸던 것도 바로 그 기독교의 틀이 유럽인의 사고방식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아무 이유도 없이 교황이 힘을 얻는 비상식적인 상황이 가능했던 역사가 유럽의 기독교 역사 덕이었다. 그것이 2000년을 이어왔다.

 

 

당시 교황이라 하면 '신이 택한 자'라는 칭호를 붙이고 다닌 자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그 근거를 댈 수 없었지만 그 한마디에 모두는 꿈뻑 죽고 할 말을 잃고야 마는 상황. 부패한 교황이 있다면 대적해야 하는 상식적인 행동도 모두 비상식으로 통하게 되어버린 역사가 유럽 중세의 역사였다.  

 

그 거대한 줄기에는 가장 피비린내 나는 새로운 줄기가 있다. 그 줄기를 이어온 민족이 '유대인'이다. 이 줄기는 역사에서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역사의 큰 사건이 터지게 되면 언제나 그들의 존재가 그들도 원치 않는 방법으로 드러났다. '제노사이드(집단 살인)'을 통해서 말이다.

 

 

유대인은 언제나 이방인이었다. 유대인은 기독교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죽인 민족이었다. 저주받아 마땅했던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만 보면 눈이 돌아갔고, 역사의 소용돌이가 발생할 때마다 증오의 감정을 그들에게 적나라하게 표출했다. 신의 택함을 받은 교황은 살인 앞에서도 눈을 감았을 것이고, 그 택함 받은 자의 명령을 받은 성스러운 십자군은 어디를 가든 유대인을 죽이는 데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십자군 전쟁은 인류에게 그 잔혹함을 재확인시킨 전쟁이었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전쟁이다. 그 잔혹함은 유럽의 역사에서 두고두고 유대인을 향해 나타났다. 그 긴 세월이 바로 홀로코스트의 역사다. 그래서 나는 십자군을 일으키는 발언으로 '예루살렘을 탈환하자'라고 말한 교황의 의도에 집중한다. 그것은 단순히 예루살렘 탈환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 나치의 작당들과 히틀러가 그러했던 것과 비슷한 감정이 숨어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치부를 가리면서 권력의 통일시키고 사치스러운 부까지 얻을 수 있는 새로운 방법으로 '유대인의 학살'을 외친 것이 아니겠나 싶다. 예루살렘이라는 단어로 양심을 마비시켜 자행한 끔찍한 역사가 지금도 반복되는 이유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는 유대인에 대해 이렇게 하나하나 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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